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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이민자 May 20. 2020

베터 콜 사울

진실과 진정성을 연출하기

터 콜 사울 4시즌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개인적인 진도다. 아직  시즌이 하나 남았다!)


‘브레이킹 배드’는 평범한 사람이 중요한 악인이 되어 타락하는 과정을 빼어나게 보여줬다. 그 과정은 삶에 대한 서운함, 자신의 능력이 발휘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한 즐거움, 상대적 정의감과 의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되지 못한다. 관성이 된 도덕감 때문이건, 두려움 때문이건, 능력의 부족 때문이건, 혹은 정상 세계에서 그나마 쌓아올린 안정의 축적 때문이건. 그래서 기막힌 대리 체험이었다.


‘베터 콜 사울’은 ‘브레이킹 배드’만큼 극적일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며드는 정도는 더욱 깊다. 그릇 작은 소인배 촉새 변호사라는 전형적인 코미디 역할에 불과할 것 같았던 주인공 지미 맥길은, 그 인물을 깊이 들여다보니 어른의 비애를 모두 담고 있는 캐릭터였다.


 ‘베터 콜 사울’이 제시하는 화두는 진실, 더 나아가 진정성이다. 공적 진실은 사후적으로 재구성된다. 바꾸어 말해본다. 사후적으로 재구성되어 설득력을 인정받는 것만이 공적 진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규정된 공적 진실을 바탕으로 뒷 이야기가 성립한다. 그게 변호사의 일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과 공적 진실이 다를 수 있다는 것, 아니, 다른 게 당연하다는 것이 지미 맥길이 파고드는 지점이다. 개인적 진실은 알아서 유지하고, 설정되는 공적 진실은 자기 앞 길을 막지 않게끔만 교통정리하면 그만, 이라는 게 그의 주된 태도다. 그의 재주는 이야기를 꾸며내서 믿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을 볼 때도 이야기를 꾸며내는 사람을, 속아 넘어갈 사람을 잘 알아본다. 그게 그의 재주고, 성취감을 느끼는 분야다. 좋게 말하면 뛰어난 미디어 아티스트의 자질이자, 수완 좋은 사기꾼의 덕목이다. 그는 매번 절박하게 열심히 일을 한다는 점에서 진정성 덩어리지만, 늘 개개인의 진실과 공적 진실을 왜곡하려든다는 점에서 진정성 제로다.


근데 진실과 진정성이란게 뭘까. 진실에 대한 입장은, 개개인이 느끼는 순간 순간의 감정의 연쇄 속에 드러난다. 같은 행위도 맥락의 차이에 따라 연민이 결합하기도, 공분이 결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감정을 실재했던 행위와 어떻게 연결시키건 간에, 그게 꼭 거짓이라 할수 있을까. 믿음직한 연결만이 공적 진실이 된다면, 그건 사건과 감정을 믿음직하게 연결시켜 진실을 연출하는 기술이 중요하다는 반증일 뿐이지, 믿기 힘든 진실은 실재했어도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뜻 아닐까. 진실과 진정성은 있는가.


그러나 진실과 진정성의 허구를 깨뜨리며 갖고 논다고 해도, 인간은 그 위에서만 마음의 집과 사회라는 건물을 쌓아올릴 수 있다. 그래서 ‘베터 콜 사울’은 어른의 드라마가 된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의 진실과 진정성도 조작이 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과 진정성을 믿어야만 모든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도 안다. 지미 맥길은 그 어른들의 세계에다 대고 왜 다들 모른 척 하며 사냐고 외치는 청소년이다. 어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어른이다. 사실 어른이 되기에 가장 중요한 기술을 갖추고 있음에도.


또 한 명의 주인공 마이크는 지미가 커버하지 못하는 어른의 스펙트럼을 커버한다. 과묵한 행동가. 규칙에 따라 할 일을 하고 가족을 보호하는 사람. 대세를 거스르지 않지만 강인한 사람. 그러나 그의 ‘어른스러움’은 점점 그를 어둠의 세계로 이끌고 살인도 불사하게 만든다.


 어른은 어떻게 인간사의 진실에 가까워지고, 그 발걸음은 어쩌다 그 자신을 타락으로 이끄는가. 진실과 진정성은 어떻게 연출되는가. 그 연출의 사이사이에 인간의 진실과 진정성은 어떻게 드러나고 소통되는가.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다. 그리하여, 픽션 외에는, 혹은 픽션에 대한 리뷰 외에는 갈수록 할 말을 하기가 어려워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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