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연출, 아델 에넬 출연.
<워터 릴리스> naissance des pieuvres
셀린 시아마 감독
아델 에넬, 폴린 아콰르, 루이즈 블라쉬르
1. 고요, 극장의 존재 이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매우 인상깊게 보았다. 특히 영화를 채운 고요가 인상적이었다. 난 그게 미디어나 전자제품의 소리가 없는 시대의 재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대극인 <워터 릴리스>에서도 그 고요는 여전하다. 그리고 그 고요를 통해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에 흠뻑 몰입하게 된다. 우린 흔히 영화는 스펙터클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그 스펙터클에는 오케스트레이션이 가미된 웅장한 음악과, 현란한 음향효과도 포함된다. 하지만 자극으로 가득한 영화는 굳이 극장이 아니어도 그 자극을 전달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극단적 고요를 통해 인물의 감정의 격랑에 동참시키는 것이야말로, 극장이라는 어둡고 제한된 공간이 제공할 수 있는 스펙터클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조용하고 대사도 액션도 격렬하진 않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감정의 스펙터클을 읽는다. 극장은 이제 액션과 폭발의 스펙터클을 위해 존재하기보다는, 은밀한 감정의 세세한 해부를 위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 언제든 리모컨이나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 지루함을 이겨보려는 인간의 욕구를 지연시키기 위한 공간.
2. 관능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를 두고 ‘lesbian gaze’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았다. 영화는 타인의 몸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소유욕 어린 시선을 적극적으로 연출한다. 그리고 가 닿지 못하는 절망감과 안타까움 역시 손에 잡힐 듯 묘사한다. 또 가 닿은 후에 뒤집히는 관계와 마음 또한 가감없이 드러낸다. 이 모든 부분에서 영화는 인물 사이의 공기를 기막히게 잡아낸다. 감독이 잡아내는 관능적 쇼트들의 대부분은 나에겐 두 가지 자기검열 때문에 미리 탈락하는 것들이다. 하나는 성별. 나의 시선은 남자의 시선이기에 여체를 선정적으로 드러내는 게 아닐까 하는 자격지심. 둘째는 매체. TV연출자로서 관능은 최소화하거나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게 옳다는 자각.
셀린 시아마의 연출은 노골적인 순간에도 선정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먼저, 시선을 가진 인물의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카메라이기에 일반적인 선정성이 아닌 특별한 개인의 시선이 된다. 또, 인물의 욕망은 ‘타인’을 향해 있지 ‘타인의 신체’는 그 다음 문제다. 타인의 행위와 분위기를 인지하는 맥락으로서의 시선이기에, 그리고 여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시선이기에 선정성을 떠나 관계에서 오는 관능이 가득 느껴진다.
관능과 고요는 한국 TV드라마 연출로서는 가장 신경을 적게 쓰는 연출 분야일 것이다. 1차적으론, 관능은 심의 때문에, 고요는 시청자의 지루함 때문에 피하게 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관능의 표현은 구설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두 가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영화가 온 몸을 콕콕 찌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 이 담대한 고요와 관능이여.
3. 제목
<워터 릴리스>라는 제목이 꽤나 노골적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들은 수중 발레를 하고 레즈비언이다. 그리고 그들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다. 물 + 백합이라니, 하위 문화의 장르 명칭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제목이 아닌가.
그런데 원제는 무척 낯설었다. naissance des pieuvres. 문어들의 탄생, 이라는 괴상한 제목이다. 영화의 핵심 이미지 중의 하나가 수중 발레 연습 중에 물 속에서 엄청난 에너지로 움직이는 선수들의 다리 쇼트이긴 하다. 하지만 문어라니? 다른 용례를 찾아볼 정도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역 특산물로 문어 요리를 내는 식당 이름 같은 제목 아닌가.
하지만 문어는 우리 나라에선 식재료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서양 문화권에서는 혐오스러운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래서 프랑스 위키를 찾아보니 감독의 변이 있었다.
« Pour moi, la pieuvre est ce monstre qui grandit dans notre ventre quand nous tombons amoureux, cet animal maritime qui lâche son encre en nous. C’est ce qui arrive à mes personnages dans le film, trois adolescentes, Marie, Anne et Floriane. Et justement, la pieuvre a pour particularité d’avoir trois cœurs. » La « naissance des pieuvres », c'est donc la naissance de l'amour à l'âge de l'adolescence.
감독은 사랑에 빠지면 뱃 속에서 문어같은 괴물이 자라나 먹물을 뿜어낸다고 느낀단다. 그리고 영화 속 세 명의 사춘기 인물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그러하다. 더욱이 문어는 세 개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문어들의 탄생’은 사춘기 나이대 사랑의 탄생이라고 생각한다고.
감독은 기괴하고 어두운 은유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문어는 일본 문화권에선 관능의 상징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일본 문화가 폭 넓게 받아들여지는 부분을 생각하면 일본 춘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영어권 수입 제목은 ‘문어들의 탄생’일지 ‘워터 릴리스’일지 궁금해져 찾아보았다. ‘워터 릴리스’였다. 한국어로 릴리는 백합이지만, 워터릴리스는 수련이다. 그렇다. 모네의 ‘수련’이 떠오른다. 수영장에서 연애하는 여성 10대 청소년들의 이야기에 ‘수련’이라는 제목은 매우 세련되고 우아하다. 무엇보다 프랑스적이다. 연출자의 패기 넘치는 제목에 비해 마케팅 포인트를 잡은 제목이라 할 수 있다. 우린 영어 제목을 그대로 수입한 것이니, 이 제목이 ‘백합물’이라는 장르 명칭에서 온 게 아닐까 했던 의심은 순전히 나의 오해였다.
말끔하고 예쁜 제목이 연출의 원래 의도를 전달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어’의 우리 나라의 이미지상, 원제를 직역했어도 감독의 의도가 잘 전달 됐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워터 릴리스라는 제목이 모네의 그림과 직결되어 연상되지 않고 여성 퀴어물 장르 명칭을 연상시키니, 대륙을 오가며 다양한 변화와 작용을 일으키는 제목이 되었다.
4. 걸음
세 주인공의 걸음걸이가 인상에 남는다. 아델 에넬의 당당한 걸음. 폴린 아콰르의 순서없이 비쭉비쭉 성장한 듯한 마르고 긴 팔 다리의 약간 절듯이 어색한 걸음. 그리고 루이즈 블라쉬르의 성급하고 경솔한 걸음. 그 걸음에 실려 10대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들만큼 적극적이고 솔직하게 스스로의 마음과 관능을 탐구하진 못했으나.
5. 두 가지 장면.
아델이 주인공에게 첫 거부를 당했을 때 영화는 시종일관 당당했던 아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떠나는 뒷모습만 보여준다. 왜 이 극적 순간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아마도 주인공의 마음이, 자신의 거절로 충격받았을 상대방의 얼굴을 관찰할 정신도 자신감도 없었던 상태였기 때문이 아닐까.
아델은 그 후 한 번 눈물을 흘리는데, 아뿔싸 싶었다. 아델 같은 캐릭터가 자신에 의해 한 번 눈물을 흘린다면, 주인공은 그대로 영혼을 갖다 바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주인공은 더 의연하게 성장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