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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이민자 Feb 18. 2020

[영화] 작은 아씨들

1994 VS 2019

2019 버전을 보기 전, ‘네 자매 이야기다’ ‘조가 주인공이다’ 정도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2019 버전 관람 중반까지 상당히 헛갈렸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편집으로 진행하는데, 자매들의 이름(성, 이름, 약칭까지)과 서열이 숙지가 안 된 상태에서 시간대까지 넘나드니 정신이 없었다. 진행 속도도 빠르고 대사도 빨라서, 자막을 읽다보면 무슨 사건이 일어나서 어떻게 연기했는지 살펴볼 새도 없이 휙휙 장면이 지나갔다. 초중반은 영화가 아니라 유튜브 편집영상을 보는 느낌이 날 정도라,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몰입의 계기를 확실하게 주는 캐릭터는 에이미다. 에이미가 조의 원고를 태우는 순간, 에이미가 로리를 만나 반가움에 몸을 던지는 순간, 등등 에이미의 선명한 욕망의 표현이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 욕망이 조와 어떻게든 대립하게 될 거라는 걸 관객이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다 중반을 지나며 조의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현재와 과거를 통틀어 자리를 잡아가면서, 원작 내용을 완전히 잊고 있던 관객들도 이야기에 마저 빨려들어간다. 조의 캐릭터는 결핍과 욕망을 솔직하게, 진부하지 않게, 유머러스하게 드러낸다. 이 세 가지는 사실 불가분의 것이다. 네 자매는 늘 서로의 시선, 그리고 엄마의 시선에도 노출되어 있으니, 늘 어느 정도의 자기 객관화를 하게 되는 캐릭터들이다. 영화 외적으로는 팬덤이 강한 원작이 있으니 다른 얘기인 척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영화 안팎으로, 캐릭터든 연기든 솔직한 표현을 선택해 정면돌파를 하는 수밖에. 여기에 캐릭터의 자기 객관화를 약간의 유머와 함께 들이면서 진부함의 함정을 피해간다. 이 자기 객관화는 시간대를 오가며 더 강해지는데, 과거 시점의 솔직하고 강렬한 욕망이 미래에는 어떻게 보이고 달라지는가를 관객이 바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과 이야기와의 거리감 조절이 뛰어나다.


 기억에 남는 탁월한 장면들. 에이미가 로리를 거절하는 장면, 조가 로리를 거절하는 장면, (아... 로리...) 그리고 조가 엄마에게 외로움을 토로하는 장면. ‘나도 나를 모르겠는’, ‘모순되는 감정 속에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고 강렬하게 드러낸다.


마지막 편집장과의 대화씬과 그에 따른 교차편집은 2019 작은 아씨들의 각색의 가장 큰 연출적 비전을 보여준다. 메타드라마의 가능성, 작가의 성장담,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과 능동성이 모두 현대적으로 살아난다.


원작의 한계이기도 하고 이야기의 필요에 따른 일이기도 하겠지만, 남자 캐릭터들은 얄팍한 편이다. 이 이야기의 남자들은 대상화되어 있거나 거리를 둔 관찰자로서 기능하는데, 부적절하거나 방해받을 정도는 아니다. 필요한 만큼만 쓴 느낌. 여자 캐릭터들과의 관계에 기반하고 있기에, 캐릭터가 얇아지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사건과 성취 기반의 남자 주인공 위주의 액션 영화가 캐릭터가 얇아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지는데 이와는 양상이 다르다.


보고 나니 이야기의 원래 흐름대로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94년도 버전을 찾아보았다. 위노나 라이더 주연. 9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차분하고 고전적인 시대극이다. 2019년 버전이 역동적이었다면 1994 버전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정적인 톤이다. 누가 봐도 위노나 라이더가 자매 중에 압도적으로 예뻐서 몰입에 방해가 될 정도다.  조가 메그에 비해 자신을 비하하거나, 로리의 청을 거절하며 자책하는 지점에선 특히 ‘아니 왜?’하는 의문이 따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위노나 라이더는 호기심에 가득찬 눈빛과 톰보이 같은 적극성이 미모 못지 않게 빛나는 배우여서, 배우 자체의 스타성이나 아름다움은 서얼샤 로넌에 비해 위에 있다. 하지만 현대적이고 능동적 캐릭터를 만난 서얼샤 로넌이 더 조 같고, 그래서 존재 자체의 빛이 있다. 배우 비교하는 재미가 크다.


 뭐니뭐니 해도 제일 재미있는 비교는 티모시 샬라메와 크리스찬 베일의 로리다. 얼마 전 호아킨 피닉스가 크리스찬 베일에게 단 하나의 실패한 연기도 없었다며 극찬한 적이 있는데, 작은 아씨들은 어떠냐고 농담삼아 되물어보고 싶다. 애초에 약간 코미디를 의도한 바도 있는 것 같다. 어찌나 촌스럽고 느끼하던지. 티모시 샬라메는 너무 누나들에게 둘러 싸인 소년 같아 갸웃하기도 했지만, 소년의 정체성이기에 이 극에 나오는 여성들과 반목하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섞여 들어간다. 반면 크리스찬 베일은 남자 느낌이 확 나는데, 여성극에서 풍기는 남자 느낌이 좀 이질적이다.


 조의 결과적 연인 프레데릭의 비교에 있어서는 더욱 시대 차이, 취향 차이가 느껴진다. 94년 버전에선 거의 아버지뻘로 보이는 후덕한 철학 교수고 19년 버전에선 아르마니 모델처럼 생긴 또래(로 보이는) 남성이다. 19년작의 감독 그레타 거윅의 실제 연인이 나이가 한참 위인 영화감독 선배이자 본인을 감독하기도 했던 노아 바움벡임을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선택이다.


 94년 버전은 위노나 라이더, 클레어 데인즈, 수잔 서랜든, 커스틴 던스트, 크리스찬 베일의 26년전 모습을 보는 재미가 크다. 그리고 서사에 천천히 빠져들 여유를 준다. 반면 19년 버전은 작은 아씨들의 서사를 미리 알고 있다면 더 좋을, 최선의 업데이트 작이다. 서사의 흐름 속에 묻혀있는 성장담과 감정의 디테일, 그리고 미래의 비전까지 잘 담겨있다. 서얼샤 로넌, 플로렌스 퓨, 엠마 왓슨, 로라 던, 메릴 스트립, 티모시 샬라메, 루이 가렐까지 배우와 캐릭터의 현재적 매력이 뛰어나다. 내가 영화 프로 담당자라면 이 두 편을 비교 대조하며 즐거운 이야기 꽃을 오래 피울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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