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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아저씨 Nov 10. 2023

내 마음속의 기억산책. (3)

초등학교시절


초등학교시절 었던 일들을 대학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믿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대구나 부산 같은 대도시, 특히 서울출신 친구들은 "너 소설책에 나오는 이야기하는 거지? 하며 대놓고 의심하곤 했었다.



70년대 초반에는 지역이나 가정형편에 따라 생활이나 사회적 환경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부 아이들을 제외하곤 내 또래 고향친구들은 어느 정도 공감할  있는 어릴 적 이야기를 적어 보았다.


ㆍ반표시 깃발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유치원까지 3년 정도의 과정을 거치고 글이나 숫자를 늦어도 다섯 살부터는 배운다.

그러니 대부분의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이면 글을 읽고 더하기 빼기의 기본은 알고 있지만 1970년 내가 던 곳에서는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아이들이 글과 숫자를 모른 채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때도 교회나 성당에서 운영하는 사립유치원이 있어 일부 아이는 알았겠지만 글을 모르는 대부분의 아이들을 위해서 반 배정 후 입구에 깃발을 달아서 표시를 해 두었다.

빨간 깃발 반, 파란 깃발 반, 노란 깃발 반, 흰 깃발 반등으로 교실입구에 큼지막한 깃발을 반 표시 숫자옆에 걸어 두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해외로 단체여행을 가면 깃발을 보고 일행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깃발색깔을 보고 반을 찾아갔다.

학교라는 환경에 점차 익숙해지고 숫자와 한글을 배우게 되면서 반표시 깃발은 몇 개월 후 없어졌지만 숫자를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색깔 깃발로 학급을 구분한 선생님들의 아이디어가 놀랍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다.


그런데 색맹인 친구들도 있었을 텐데 그  아이들은 어떻게 반을 찾아갔을까?


ㆍ옥수수빵과 전지분유 무상급식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는 1학년생들에게 무상급식이 지원되었다.

수업은 오전으로 끝이었지만 집에 오기 전 옥수수빵과 전지분유를 끓인 우유를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수업이 끝나기 한 시간 전 번이 학교 뒤편에 있는 작업장 건물로 가서 미리 빵과 전지분유를 섞은 우유를 주전자에 담아 왔었다.

아이들에게 수업 끝을 알리는 종소리는 그 당시에는 귀한 먹거리였던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는 시간을 알려수는 희망의 종소리였다.



다른 반의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우리 반에서는 빵을 먹기 위해서 지켜야 할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빵을 받는 깨끗한 손수건 지참이 필수였다.

그 당시 아이들의 손은 시쳇 말로 까마귀가 형님 할 정도로 새까맣게 더러웠고 겨울이 되면 동상으로 손등이 거북이 등처럼 터져 있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빵을 타기 위한 깨끗한 손수건이 없으면 그날은 빵을 을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가슴팍에 늘 달려있는 콧물 닦는 손수건을 선생님께 모른척하며 내밀어 보고

아쉬운 마음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보지만 선생님은 늘 예외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실청소를 하던 중 선생님의 책상 서랍에서 파란 곰팡이가 잔뜩 슬어있는 빵을 발견했다.

빵을 먹을 수 없었던 아쉬움과 선생님에 대한 서운함이 마음속에 교차하며 어깨가 축 늘어지고 눈물이 맺히던 그때 그 시절.


ㆍ화장실에 빠져 죽었다는 소사 아저씨


학교마다 소사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는 빠질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초등학교에서는 옛날에 소사 아저씨가 화장실에 빠져 죽어서 소풍날이면 비가 온다는 괴담이 있었다.



소풍은 그 당시 아이들에게 일 년 동안 손꼽아 기다리는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날만은 맛난 김밥과 과자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행여나 소풍이 취소될까 며칠 전부터 비가 오지 않길 간절히 기도했던 일이 생각난다.

소풍날 아침, 걱정반 기대반으로 아침에 눈뜰 때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ㆍ아이들의 영웅, 김일과 프로레슬링


7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 시대를 대표하는 드라마와 스포츠를 꼽으라면 이 두 가지를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국민드라마 "여로"와 "프로레슬링".

이 드라마나 김일선수가 출연하는 프로레슬링을 방영하는 시간에는 거짓을 조금 보태면 길가에 개미새끼 한 마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 당시 아이들에게 김일선수는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경기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김일선수의 시원한 박치기 한방을 잊을 수가 없다.

동네에 작은 모래사장만 있으면 아이들은 뒹굴며 레슬링을 하며 놀았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교실과 복도바닥은 마루로 되어있어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면 레슬링을 하며 놀았다.

초와 마른걸레로 교실과 복도바닥을 늘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았으니  뒹굴면서 레슬링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김일 선수를 흉내 내며 친구들과 장난 삼아 레슬링을 했던 그때부터 알게 모르게 나의 격투(?) 실력이 늘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누구에게도 패(?) 한 적이 없는~~~.


ㆍ동요경연대회 "누가 누가 잘하나"


5학년때였을 것이다.

담임 선생님이 우리 학교 핸드볼 팀 및 체육담당교사였었다.

그  당시 학교 운동팀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악명이 드높았다.

그래서 우리 반은 늘 긴장감이 감돌았고 다른 반 아이들보다 단체기합도 많이 받았다.

단 하나 좋은 점은 선생님이 핸드볼 연습 및 경기출전으로 인해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아 임시  담임선생님이 자주 배정되어 숙제가 거의 없었다.

또 음악시간에는 선생님이 풍금을 연주하지 못해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다른 반 여선생님이 오시거나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여학생을 데려와서 풍금을 연주하게 하고 내가 선창을 하고 아이들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매년 학년말에 수여하는 우등상중 5학년때까지 한두 번은 예능상을 탄 것으로 보아 그때는 노래를 꽤 잘했었던 것 같다.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가수 모창도 그럴싸하게 해서 어른들이 마을 노래자랑에 나가 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해 마침 대표적인 동요경연대회인 "누가 누가 잘하나?"가 안동시민회관에서 열리게 되었다.

어느 날 오후 음악실에 오라는 부름을 받고 가보니 3학년 여학생과 음악을 담당하는 여선생님이 있었다.

학교를 대표할 참가자를 뽑는 자리였다.

순서대로 번갈아 두곡씩 노래를 부르고 난 후 선생님께서 참가자로 잠정적으로 나를 선택하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참가하려면 옷을 따로 맞춰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로 우리 집 형편이 가장 어려운 시점이었던 것 같다.

조심스럽게 어머니께 말씀드렸지만 예상대로 참가복 마련이 어려워 "누가 누가 잘하나"참가는 3학년 후배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나, 이외에 누구도 알지 못하겠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아쉬운 기억의 한 조각으로 남아있다.


ㆍ집합공부


예나 지금이나 정규시간 이외에 추가로 뭔가를 하는 것에 대해 내게는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것 같다.

초등 3학년 때 산수에 집합의 개념이 추가되었다.

학기 초에 집합에 대한 과정이 산수 교과서에 실리지 않아 추가로 자료를 배부하고 방과 후 선생님이 보충수업을 해 준다는 것이었다.

자료를 보니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고 방과 후 친구들과 뛰어놀 생각에 보충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땡땡이를 쳐 버렸다.



동네에 와  보니 친구들은 다 보충수업을 받고 나만 혼자 집으로 온 것이었다.

내일  시험도 본다고 했는데  걱정과 두려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보충수업 미참여에 시험까지 못 보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그날 오후는 내 생애 가장 열심히 스스로 공부한 날이 되었다.

다음날 선생님의 따가운 눈총아래서 천만다행스럽게 시험도 통과했다.


ㆍ전학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을 했다.

초등학교가 신설되어 인근 동네에 사는 학생들은 신설학교로 모두 강제전학을 하게 된 것이다.

졸업을 한 학년 남겨두고 전학을 해야 하는 것이 못내 서운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학 첫날, 몇 개 학교에서 아이들이 모이다 보니 학교출신별로 팽팽한 기싸움이 벌어졌다.

차이는 있겠지만 어른들처럼 아이들 사회도 나름대로 룰을 가지고 있다.

출신 학교를 대표해서 선제적으로 기선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다른 학교출신 학생이 시비를 걸어왔다.


그 학교 대표 격으로 싸움을 좀 한다는~~.


나이는 한 살 아래지만 동급생인 사촌동생을 괴롭히며 의도적으로 나에게 도발해 왔다.

굳이 싸움에 휘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동생이 당하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동생들과 조카들은 내가 지킨다!"는  가디언의 역할에 충실해 왔던 터라 이번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학교 뒤편 수십 명의 아이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시작된 싸움은 1분이 채 되기 전 상대 아이얼굴에서 코피가 흐르며 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 싸움으로 타 학교 아이들의 기선을 초기에 제압함으로써 6학년 내내 상위그룹(?)의 위치를 차지하며 아이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 이후 시간이 지나가면서 친구들과 서로 얼굴도 익히고 신설학교인 관계로 학교일을 죽도록 같이 하다 보니 1년만 다녔지만 동급생들과는 가족처럼 친해질 수 있었다.

학급에서도 난로담당, 분단장의 역할을

그리고 학교행사에서는 응원단장의 역할을 충실(?) 수행해 졸업 전 제1회 동창회 부회장선거에서 기존의 반장, 부반장들을 제치고 부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동창회 회장은 전교 어린이 회장이 당연직으로 승계하였기에 일개 반 분단장이 동창회 부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아무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평상시 1년 동안 친구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 결실이었다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더 많은 일들이 기억에 남아 있지 나의 초등학교생활 6년은 이런 추억들과 함께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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