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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구 Aug 09. 2018

'원더우먼'은 또 다른 남성 판타지일 뿐이다.

맘마미야의 소피와 도나가 조금 더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원더우먼이 얼마나 쉽게 악당들을 때려잡든, 퓨리오사가 얼마나 멋지게 세상을 뒤집고 권력을 잡든, 아무리 그녀들의 활약과 승리가 통쾌한 들, 그녀들은 결국 남성 영웅담을 반복하는 캐릭터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승리가 아니면 패배만이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보통은 남성들의 무기로 알려진 무력을 사용해서 상대를 제압하고 승리를 거머쥐는 그녀들은, 남성적 폭력으로 이뤄진 위계적 문화가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나 또한 그녀들의 싸움을 응원하고 그녀들의 승리에 기뻐했지만, 그녀들보다 더 강한, 정말 정말 센 나쁜 놈들이 등장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녀들은 질 것이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녀들의 세상에는 선과 악, 승과 패만이 존재하니까. 많은 남성 판타지가 그런 것처럼.


남성의 입장에서 이러한 '남성 판타지'들이 가지는 큰 문제 중 하나는, 그 영웅들의 이야기에 내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이다. 슈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등등 수많은 맨들에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제프 베조스 등등의 슈퍼 부자들 등등, 끝없이 긴 남성 영웅 신화들이 여성을 배제하고 '남성'을 영웅으로 만들어주면 뭐하나, 나는 그들과 같은 영웅이 아닌 걸.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기껏해야 보통의 인간에 불과한 것을.


궁극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슈퍼맨' 신화들은 여성 뿐 아니라 절대다수의 남성들 또한 소외시킨다. 영웅의 이야기들을 보며 우리는 영웅을 찬양하고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착각을 하지만,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 현실에서의 우리는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웅 이야기들은 평범함 속의 만족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지구를 지키고 인류를 구하는 그들은 우리를 무력하고 그저 그런 배경과 같은 존재로, 혹은 지켜줘야 하는 그런 약한 존재들로 인식할 뿐이다.


원더우먼과 퓨리오사를 보며 환성을 지르는 그대여, 영화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대는 영화 속의 그녀들처럼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는가? '그렇다!'라고 소리 지를 수 없다고 나를 노려보거나 속상해하지 말라. 나 역시 그대와 같다.


물론 모든 영화는 픽션이고 판타지이다. 그리고 우리는 '판타지'를 통해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래,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포스터의 주인공들 사진만 보고도 '아, 이 캐릭터가 저 캐릭터를 이기겠네'하는 영화가 정. 말.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을까? 당신은 그런 절대적인 영웅들에게서 당신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의 세상과 조금도 닮아있지 않은데? 정말로? (뭐, 솔직히, 그럼에도, 나 또한 액션 영화 좋아한다. 탐 크루즈 오빠는 여전히 멋있더라.)


나는, 수없이 많은 실수와 상처 속에서 그래도 어떻게 살아 남은 사람의 이야기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내일은 더 좋아질 거야'라고 멋지게 이야기하는 넓은 등의 '슈퍼맨'이 아니라, 흔들리는 눈동자로, 조금 떨리는 목소리, '그래도 어떻게 살아 남았네'라고 이야기해줄 때, 나는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The Good Place의 Eleanor가 그랬지, '인간은 모두 언젠가 죽음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늘 조금은 슬프다'라고. 그리고 그 '슬픔'이 우리를 조금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라고.

우리에게 힘을 주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런 불완전함이다. 남성 영웅 신화에서 배제된 '인간'을 보듬어주는 것은 남성보다 강한 여성 영웅 신화가 아니다. 세계를 구한 그녀들은 결국 영웅의 반열에 올라 우리를 잊어버린다. 다른 모든 영웅들이 그래왔듯.


그래서 나는, 맘마미야의 소피와 도나에게서 더 많은 위로를 받는다. 지구를 지켜낸 위대한 영웅도, 왕자의 택함을 받은 아름다운 공주도 아닌,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그것을 두 손으로 지켜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녀들. 그녀들의 웃음과 울음은 오롯이 그녀들의 몫이다. 가장 완벽하길 바라는 순간 갑작스레 호텔 바닥에 금이 가고 폭풍으로 장식들이 엉망이 되어버리지만, 그건 정말이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사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일의 결과들이 늘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오히려 기대가 큰만큼 실망도 큰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걸. 그녀들이 하듯, 잠시 슬퍼하고 괴로워하다 다시 털고 일어설 수 밖에 없다는 걸.


그래서, 보통의 사람인 나에게 소피와 도나는 고마운 캐릭터들이다. 위대한 영웅들처럼 혼자 고민해서 우리를 지켜주는 대신, 그녀들은 우리 곁에서 함께 망설이고, 함께 흔들린다. 우리와 그녀들은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같이 일어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그렇게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된다.


이 영화에 대한 코멘트들에 대해 꼭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녀들이 강하다면, 많은 실수와 결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견뎌내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결코 그녀들이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니다 (심지어 강한 어머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녀들은, 어머니가 되기 전부터, 임신하기 전부터, 이미 강하고 독립적인 하나의 인간들이었다. 그녀들의 삶을, 그녀들의 의지와 투쟁들을 '어머니'라는 단어로 지워버리지 말자.


여성은 강하다. 어머니이든 아니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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