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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구 Apr 24. 2019

파리에서 살다보니 이런 일 저런 일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사람들이 무언가를 인지하는 방식은 개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무척이나 다른 듯하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 참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워낙 당연한 일인지라 딱히 좋네 나쁘네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만 덕분에 재미있는 일들을 자주 보고 듣고 겪게 된다는 정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관광의 도시이자 비영어권 도시에서, 높은 확률로 외국인 관광객일 것으로 추정되는 인종의 한 사람으로 살다 보니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경험들을 종종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특히 재미있어하는 패턴은 다음과 같다. 이 도시의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경우 워낙 많고 다양한 관광객들을 상대하다 보니, 내가 영어로 얘기하든 프랑스어로 얘기하든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나에게 영어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먼저 프랑스어로 인사를 한 경우, 혹은, 심지어는 내가 프랑스어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편안해하고 좋아한 후에도(!) 다시 반사적으로 영어로 돌아가 대화를 이어나갈 때들이 있다. 가끔은 종업원이 혼자 왔다 갔다 오락가락하며 웃으며 미안해할 때가 있을 정도. (네, 대화 중간에 언어를 스위치하는 것은 무척 헷갈리는 일이죠, 저도 잘 알고 있으니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아아...)


이름을 묻는 스타벅스 종업원에게 Jon이라고 대답을 해주며 겪은 오늘 일은 비슷한 맥락이지만 또 전혀 다른 방식의 전개. 다년간의 경험과 실험 끝에, 누군가가 이름을 물으면 (정식 문서 작성 등을 해야 하는 공식적인 상황이 아니면) 언어 상황에 따라 보통 Jon, 혹은 John이라고 대답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어떠한 이유로도 문제가 생기지 않고 편한 대화가 가능한 이름.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종업원이, 그것도 내게 직접 주문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뒤에서 갑자기 컵을 들고 나타난 종업원이 세 차례나 이름을 다시 묻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계산을 하고 영수증을 받고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컵을 들고 한참이나 무언가를 쓰더니, 잠시 후 웃으며 다가와 '이름을 쓰다가 잊어버렸다, 미안-'이라고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아니 대체 뭐가 왜! Jon/John에서 '쓰다가 잊어버릴' 뭐가 있기라도 한 거냐! 잠시 후 받게 된 커피 컵은 다음과 같았다.



"Joo-Won". 맙. 소. 사. 세 번이나 정확하게 Jon이라 발음해줬건만, 어떻게 "주원"이라는 한국어 이름을 상상해 낸 것이더냐, 넌! (... 게다가 내 이름이 주원인 것도 아니고...) 아무리 내가 동양인인 것이 명백하다고 해도 말이지, 두 이름의 발음은 너무 차이가 큰 것이 아니냐... 와아아... 내 커피잔에 이름을 적은 그 청년은 그 직후 이미 퇴근을 해버렸었기에 물어보거나 할 수도 없었고 그저 혼란 반 신기 반 한 상태로 나는 커피를 마시고 앉아있었더랬다.


적어도 30분, 혹은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였을까. 그저 '이름을 쓰다가 혼란에 빠져서 그림도 그렸나...'라고 생각하고 무심히 넘겼었던, "Joo-Won"이라는 (상상의) 이름 밑에 그려져 있는 알 수 없는 심볼이, 한글 "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청년은 최근에 드라마 등을 통해 한국어를 조금 익혔었나 보다. 그래서 그는, 나를 한국인으로 짐작 -> 따라서 내 이름이 J로 시작하는 어떤 한국어 이름일 것으로 짐작 -> 창작의 고통에 한참 헤맴 -> 게다가 한글로 '원'을 어떻게 쓰는지 잊어버렸었음, 대략 이런 과정 끝에 나에게 웃으며 사과하고 컵을 남긴 채 사라졌었나 보다. 허허허 청년, 거참.


한편으로 그 프랑스 청년은 어떤 이유로 나를 한국인 - 본인이 해당 언어를 조금 아는(!!!) - 일 것이라 생각했기에, 내가 아무리 충분히 정확한 프랑스어로 Jon이라 소개를 했어도 어떻게든 비스무리한 한국어 이름으로 듣고, 해석하고, 쓰기 위해 노력을 했었던 게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그 청년이 한글로 무언가를 써줬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었기에, 'Joo' 밑에 '주'라고 썼음에도 한 시간 정도 후에야 그것이 기둥 그림이 아니라 한글 글씨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게다.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그 청년, (못) 보고 싶은 대로 (못) 본 나.


오늘의 저 일은, 조금 웃긴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내 말마따나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열린 눈으로 바라보고 열린 귀로 들어야겠지 싶은 생각을 들게 했더랬다. 내가 알고 있다고, 보고 듣고 있다고 생각한 덕에 못 보고 못 듣고 모르고 넘어가게 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앞으로 조금 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그리고 다음번에 혹시 그 스타벅스에서 그 청년을 마주치게 되면, 웃으며 한 번 이야기를 걸어줘야겠다. (... 그거 내 이름 아니라고...-_-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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