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빌리티'가 아닌 '이해'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하자마자 ‘한글 2022’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대부분의 사기업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MS)社의 워드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지만, 공공의 영역에서 근무 중인 나에겐 국경선 너머의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모니터 한 가득히 채워진 문서에는 초안을 잡아 놓았던 내용들이 수정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오늘도 그 문서와 한바탕 힘겨루기를 했다.
공공기관에 있다 보니 사소한 것에도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다. 사기업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의 불편함인지는 비교해 볼 수는 없지만, 민간 영역의 분들과 협업을 할 때면 항상 공공기관의 한 발 늦은 결재를 기다려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발생한다. 하지만, 공공기관은 세금으로 조성된 예산을 사용한다는 점 때문에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하고 이러한 원칙은 논란의 여지없이 지켜져야만 한다.
공공기관의 문서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보조장치들이 존재한다. 대통령령인 「행정업무의 운영 및 혁신에 관한 규정」과 이를 뒷받침하는 시행규칙에는 공문서의 종류부터 작성, 결재까지 모든 것들이 규정화•매뉴얼화(행정업무운영 편람)되어 있다. 그리고 적법한 절차에 의해 결재가 완료된 문서는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영구히 또는 일정기간 보존된다. 국민들은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의해 이미 공개되어 있는 문서를 확인할 수 있고, 더 보고 싶은 문서는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받아볼 수 있다. 청구를 받은 공공기관의 입장에서는 정보공개율이 기관평가와도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가급적 공개를 전제로 공개여부 검토를 시작한다.
이렇듯 공공기관의 문서는 보존과 공개가 전제되다 보니, 문서를 작성하는 담당자의 입장에서는 오탈자나 비문이 있을까 봐 노심초사하게 된다. 이른바 문서의 ‘와꾸’에 신경 쓰게 된다. 물론 기관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아래와 같은 가이드라인이 존재하긴 한다. 가이드라인에 따라 문서의 내용이 채워지고 나면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자간을 줄이기도 하고 다듬기 시작한다. 문서를 ‘있어 보이게, 만드는 과정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온갖 ‘표’들과 사진들이 삽입되기도 한다.
문서의 제목: 'HY헤드라인 M' 20 Point
중제목(□): 'HY헤드라인 M' 15 Point
소제목(○): '휴먼명조' 15 Point
세부내용(-): '휴먼명조' 15 Point
보조자료(*): '중고딕' 13 Point
공공기관에 근무하면서 문서를 ‘있어 보이게’ 작성해야 한다는 점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공공기관이 가지는 최소한의 품위(신뢰성) 일 수도 있고 담당자의 '문서작성역량'일 수 도 있다. 하지만 과도한 보여주기식 작성은 문서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가령 대국민 공개가 전제되는 문서임에도 현직에서만 알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한다던가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수치를 기재하곤 한다. 국민이 아닌 결재권자의 결재를 위한 문서가 작성되는 것이다.(이런 문서들은 스스로도 부끄러운지 비공개문서로 취급되어 공개되지 않기도 한다.)
공공정책의 수혜자들인 국민들이 알기 어려운 문서는 분명 히도 잘 못 작성된 문서이다. 반대로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서는 칭찬받아 마땅한 문서이다. 법무담당자로서의 경험이지만 복잡하게 쓰여진 문서는 책임회피의 수단으로 악용된다. 이러한 모습을 자주 접했던 탓에 나는 '있어빌리티'로 포장된 '문서작성역량'보다는 덜 복잡하더라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나 스스로가 당당하게 책임질 수 있는 문서를 작성해 나가고 싶다. 그렇게 성장하고 싶다.
사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어차피 최종결재권자는 수혜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