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원 Jan 25. 2024

만년필을 쓰는 이유

  새로운 기술을 빨리 경험해 보고 싶은 탓에 누구보다 전자기기를 빨리 접했었다. 빠른 눈치를 가진 터라 설명서를 보지 않아도 많은 기능들을 사용할 수 있었고 숨겨진 기능들도 손쉽게 사용했다. 요즘에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용어 같지만, 제법 얼리어답터의 흉내를 내는 사람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만을 생각해 보더라도 갤럭시 휴대폰, 갤럭시탭, 갤럭시워치, 갤럭시북을 거쳐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워치, 맥북, 아이맥을 모두 경험해 보았으니, 전자제품을 좋아하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도 새로운 전자제품을 언박싱하고 세팅하는 일은 늘상 설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자제품을 잘 활용한 탓에 전공 서적을 스캔해서 태블릿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1세대였고,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다양한 앱들의 유료 결제를 통해 소위 '템빨'로 업무의 효율화를 맛보았다. 최근에는 AI가 우리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AI가 접목된 제품들로 일상생활 속 루틴들을 자동화했고 ChatGPT를 통해 기술의 발전을 몸소 체험했다.


  특히, 네이버에서 출시한 '클로바 노트'는 음성파일을 자동으로 기록화하여 주는 단순하지만, 꼭 필요한 기능으로 나를 비롯해 수많은 직장인의 회의록 작성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켜 주었다. 이따금씩 ChatGPT까지 활용하는 날에는 내가 일을 하는 것인지 AI가 일을 하는 것인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듯 영화 속 아이언맨처럼 첨단의 기술과 인공지능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크 원자로를 떼어내고 수술을 받는 토니 스타크처럼 본래의 모습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 시작은 회사에서 도입한 업무 협업툴이 정착되던 시기였다. 외부관계자에게서 온 협조 요청 메일이더라도 내부 구성원을 지정해 담당업무로 지정할 수 있었고, 업무의 진행 상황도 바로바로 관리할 수 있는 효율성에 집중한 시스템이었다.           


  클릭 몇 번에 업무를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은 누구에게나 편리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등록되어 버린 업무와 몇 번의 마우스 클릭을 통해 전달되는 비대면을 동반한 의사표시에서 피로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짧은 통화였지만, 협조 요청 이전에 나의 의사를 먼저 확인하여 주는 타 기관 직원의 모습에 “이게 당연한 일이었는데...”라는 왠지 모를 씁쓸함과 공허함이 느껴졌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과 같은 큰 계기는 아니지만 그날의 통화 이후로 아날로그 방식에 대해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디지털과 자연스레 살아왔지만, 사회적 동물로서 살아가는 나의 모든 활동이 사람으로서의 행동이 아니라 나 자신이 구성 요소가 되어 데이터를 완성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그렇게 완성된 데이터들이 쉽게 수정되거나 삭제되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은 곱씹을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것도 아주 먼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클릭 몇 번으로 자동화되어 기록되던 일상에서 만년필의 뚜껑을 돌려 연 다음 잉크를 채우고 펜촉으로 종이를 스쳐 지나가는 사각거리는 필감을 느끼기로 했다. 나에게 소중했던 순간을, 또는 중요할 순간을 직접 기록하기로 한 것이다. 흔히 말하는 디지털 디톡스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겠지만 상대방에게 나의 태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마주 앉은자리에서 몸을 가리는 노트북에서 어떤 글이 쓰이고 있을지 모르는 키보드의 타건음보다, 당신과 함께 나누고 있는 이 순간을 어렵고 깐깐한 만년필로 기록해 나가며 쉽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우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