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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원 Jan 18. 2024

지우개

성인이 되고난 후, 멀어져 버린 친구

  며칠 전, 잡동사니가 가득 찬 서랍을 정리하다 학창 시절부터 사용했던 필통에서 작은 지우개를 마주했다. 모서리의 한 부분이 유독 닳아있고 연필로 연신 찔러댄 탓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걸 보니 내 손을 거쳐 간 지우개임이 분명했다. 십여 년 전 나의 학창 시절을 함께 했던 지우개를 마주하니 오랜 시간을 잊고지내다 우연히 친구를 만나 담소를 나누듯 자연스레 지우개와 관련된 기억이 떠올랐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6월을 맞이해 호국보훈의 달 기념 글짓기 대회가 있던 날이었다. 마감일이 다가와야 집중력이 샘솟듯 한참을 고민하다 한반도가 그려진 교과서 위에 우연히 올려져 있던 지우개를 보곤 글 한 편을 뚝딱 완성했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반도 위에 그어진 38선을 지우개로 지워내고 또 겉으론 지워내더라도 오랜 시간이 만들어 낸 흔적까지는 지워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단숨에 써버린 글로 상을 받게 되었고 무뚝뚝했던 부모님께 칭찬받아 행복했던 순간이 가슴 한켠에 저장되어 있다. 그날이 있었던 뒤로 지우개는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서도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게끔 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사연이 없더라도 지우개는 우리들의 학창 시절을 함께한 친구였음이 분명하다. 


  등보다 컸던 가방을 메고 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운동장에서 낯을 가리던 초등학교 1학년부터 수능 날 수리 영역 문제를 풀던 시간까지 내 필통의 한편을 담당했던 친구였지만 이상하리만큼 그 이후부터는 서서히 멀어져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성인이 된 후에는 연필이나 샤프를 사용한 적이 손에 꼽는다. 대학에서 시험을 치르거나 사법시험 공부를 할 때도 연필과 지우개보다는 볼펜과 수정테이프를 사용했고, 어엿한 30대 초반의 직장인이 되어버린 지금은 애플펜슬 하나로 모든 것을 대체해 버렸다.


  이제서야 생각해보니, 지우개를 통해 세상을 연습하고 나서야 지울 수 없는 볼펜을 사용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순간순간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지금의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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