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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원 Jun 27. 2024

충무로 ‘동국 할머니집’ 사장님.

감사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8시 52분. 느지막이 일어나 침대를 벗어나려던 일상적인 순간에 익숙하지 않은 메시지 받았다. '訃告(부고)'라고 명기된 이러한 메시지들은 단순히 정보전달의 역할을 하는 일률적인 내용에 불과하지만, 받게 될 때마다 항상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메시지를 클릭해 세부내용을 확인할 때면 상대방을 대면하지 않고 있음에도 잠시나마 또는 한참 동안 묵직한 무게감을 공유하게 되는 어렵디 어려운 메시지이다.


부고(訃告)「명사」 사람의 죽음을 알림. 또는 그런 글
애도(哀悼)「명사」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추모(追慕)「명사」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함.


  태어난 지 31년 7개월 정도가 되었지만, 장례식보다는 결혼식에 참석하는 일이 더 많았고 익숙했다. 대학을 다니고 회사생활을 하며 삶을 살아오는 동안 국가적인 참사와 지인들의 조부상 등 다양한 종류의 '부고'를 접했지만, 슬픔에 대한 위로를 넘어 깊은 마음으로 누군가를 추모한다는 감정을 느낀 적은 많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대부분이 애도의 감정에서 멈추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짧았던 삶에서 가족을 제외하고는 '국어사전'상의 '추모'의 의미를 떠올릴 수 있는 부고는 하나뿐이었다(정확히는 오랜 시간이 지나 소식을 접했었다).


  대학시절 동기•선후배들과 함께 가던 충무로의 '동국 할머니집'이라는 노포가 있었다. 상호와 달리 사장님은 할아버지셨고, 대학생들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알기에 저렴한 가격임에도 풍성한 양으로 베풀어주셨던 분이었다. 아직도 야간수업을 마치자마자 튀어나가 양념이 촉촉이 배어진 제육볶음에 살얼음 낀 동동주를 함께 마시며 사장님과 재미난 대화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충무로에 방문할 일이 있으면 항상 찾아가 가끔씩 사장님께 안부를 전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마주할 수 없었다. 코로나가 우리와 거리 두기를 시작할 때쯤 다시금 방문을 시도했지만, 활짝 열리던 문은 너무나도 튼튼하게 그리고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또 그렇게 일상을 보내며 그곳의 소식을 궁금해하다 사장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후배들로부터 접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자주 가던 술집의 사장님이 돌아가신 것뿐인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 사장님은 대학시절 인생 멘토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나의 고민을 들어주시고 또 미래를 격려해 주셨던 분이셨다. 


  이러한 사장님의 부고소식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단순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안부를 곁들인 대화조차도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사장님과 함께했던 추억을 이제 나 홀로 기억할 수 있다는 외로움이었다.


  

  올해 4월 학교를 방문했을 때에도 나는 정답을 모두 알면서도 괜한 기대감에 어김없이 추억의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는 근처의 공간과 대비되는 묵직한 고요함과 쌓여버린 먼지가 알려주는 부재의 시간을 확인하며 사장님을 그리워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에서 한참 동안이나 행복하고 재미났던 추억을 떠올렸고, 끝내 묵직한 그리움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함께한 추억을 잊히지 않게 하는 것'이 추모의 진정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돌아가신 사장님이 생각난다.

나뿐만이 아니라 충무로 '동국 할머니집'을 아시는 모든 분들이 나와 같은 그리움을 느끼실지도 모르겠다.


사장님. 그곳에서도 항상 웃으며 지냈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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