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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Mar 17. 2017

최근의 소고.

적당, 적당히.

이 글을 데이원이 아닌 에버노트에서 적고 브런치에 발행하는 이유는 별 게 없다. 그냥, 적당히 공개하고 적당히 말하고 싶어서. 논란이 될 수도 있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어딘가에 토하고 싶었고, 토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혜진이와 우신이형과 밥을 먹고 세미나에 가려다가, 근처 스타벅스에 멈춰섰다. 듣고 싶은 세미나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들어야 할 세미나도 아니었다. 다음주에나 가야지.


어제 A와 전화를 하다 무심코 지하철 거울을 보았다. 지하철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표정이었다. 내가 이렇게 표정이 없었나? 할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언론대학원 조교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분이 와도 그저 기계적인 웃음과 무표정으로 대응했다. B에게 배운 기술이다. 감정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내가 어떤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감정의 동요가 없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해야 한다. 무표정은 나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 방어기제였다. 


현기증. 


언제부터인가. 이유 모를 현기증을 느낀다. 그로기 상태에 놓여있고, 입에 물려있는 치아보호장치는 적당히 헐거워진채 눈이 부어있고 코피가 난다. 그 상태로 고개를 떨구고 링 위에 겨우 버티고 서있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버티고>에서 이유 없이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처럼, 소설 <오발탄>에서 “가자, 북으로”를 외치는 사람처럼, 어디론가 방향을 잃었다. 영화 <코어>에서 지구의 자기장이 멈추자 방향을 잃고 벽에 부딪치는 수많은 철새무리처럼 방향을 잃고 방황 중이다.


점점.


C의 실패가 큰 모양이다. 모두들 떠났고, 나는 남았다. 어쨌거나 마무리 투수로 일을 마무리 해야 한다. “왜 안나와요?”, “같이 일할 수 있을까요?” 라는 수많은 메시지가 나를 지치게 한다. C에서 겪은 수많은 갈등과 반목 그리고 실패에 내 지분이 있듯이, 내 속엔 그 실패의 DNA가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뒤척인다. “뭐라도 되겠지”라고 되새기던 내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뭐라도 될 수 있을까?”는 생각만 든다. 야심차게 준비한 모든 것들은 엎어지고, 모두들 각자 갈 길을 고르고 성장하는데, 난 그대로다. 안감독님, 전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요. 


D는 어떻게든 자리를 잡았고, E와 F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성장을 바라본 나로서는 뿌듯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난 어떻게 됐을까. C의 마무리를 하고 있는 입장에선 서운한 것도 있고, 부러운 것도 있고 그냥 그런 입장이다. 모두가 성장하고, 좋은 제안을 받고 있는데 정작 낙동강 오리알 된 기분이랄까.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모든 선수들을 빅4에 보낸 토트넘 코치 느낌이다. 한 때 팀이었던 사람들이 다 각자 다른 자리에서 서로의 팀원들과 일하고 있는 모습.


솔직히 말하면, 별로 듣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이런데, 너희는 왜?" 라고 억하심정에 가득 찬 내가 보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용히 카톡을 꺼둔다. 스스로가 미워 다시 눈을 감는다. 그 속에서 나는 묻는다.  나는 어느 좌표에 있는가.


여튼, 박탈감 아닌 박탈감, 패배감 아닌 패배감, 외로움 아닌 외로움을 느끼다보니, 여러 실패를 겪다보니 표정은 무덤덤해지고 마음은 모나진다. 다른 사람의 성공이 아닌 실패를 바라고, 축하보다 저주의 말을 내뱉는다. 그냥 모두가 미웠다. 그동안 많이 도와주신 G, H, I, J 등 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미워하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그러다 고개를 떨군다. 


남탓하지 말자, 아무도 탓하지 말자고 수없이 맹세했건만 결국 모두를 탓하게 된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떨구는 일. 


“왜 우리한테는 그랬을까”, “그때 우리한테 그랬으면 달라졌을텐데”, “우리한테 지적한 문제점을 왜 그들은 그대로 가져갈까?”, “왜 내로남불일까?”, “우리가 했을 땐 거절하고, 왜 자기네들은 하는 걸까?”, “처음부터 그랬을거면 희망이라도 주지 말든가"


개인의 실패를 외부에서 찾고, 남에게 저주를 내뱉으니 무서워서 말을 아끼고, 말을 아끼다보니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모두 내가 감내해야 할 짐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르고 정신과 육체는 다르다. 


모두가 징그럽고, 모두가 지겨웠다. 모두가 원망스러웠고, 모두가 고마웠다. 모두를 사랑했고, 모두 싫었다. 


내가 힘든데 뭐가 정의고, 뭐가 다양성이고, 뭐가 비즈니스 모델이고, 뭐가 수익성이냐. 욕지거리가 나온다. 그 욕은 모두를 향한다. 아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나 역겹다. 좆같이 마케팅하는 그 개새끼도 싫고, 돈도 안되는 일만 좆나게 하다 번아웃된 나도 좆같고, 집구석도 좆같고, 열람실도 좆같고, 다 좆같았다. 


아직도 그렇다. 12시 17분 막차를 타고와, 1시 즈음 집 근처에 도착한다. 역에서 집까지 가는 길엔 가로등이 있는데, 띄엄띄엄있다. 가로등 사이사이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데,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어떻게 될까”, “왜 안됐을까”, “저주한다” 등 온갖 말들이 귓등에 머무르고, 머리로 들어와 나를 휘젓는다. 시공의 폭풍은 해본 적도 없는데, 마음을 뒤집는다.


그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이 웜홀을 통과할 때처럼, 난 실패라는 어둠 속에서 숨이 막힌다. 토악질이 나온다. 왼쪽 귀와 오른쪽 귀에서 한 번씩 발병한 이석증이라는 놈은, 내 삶과 가장 닮아있다. 


세반고리관에 붙어 있는 돌이 떨어져나와 어지러움을 유발하는데, 약을 먹고 며칠 푹쉬면 이 돌이 원래대로 붙거나 자연스레 녹아 없어진다고 한다. 나는 녹아없어질 존재일까, 아니면 방황의 끝에 종착할 사람일까.


적어도, 현재의 나는 어지럽게 세반고리관을 탐험하고 있는 돌이다. 차츰차츰 녹아, 스스로를 모나게, 못나게, 무표정으로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그런 흔하디흔한 저주받은 존재가 될까 겁난다.


나는 왜.


나는 왜.


우리는 왜.


나는 왜.


스스로르 저주하고 세상을 저주하는데, 이 저주가 싫어서 그냥 여기다가 토하고 마련다. 


최근은 그랬다.


우울, 실패, 좌절, 방황, 현기증, 토악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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