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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Aug 11. 2017

개와 늑대의 시간

이유 모를 불면을 겪는다. 하, 새벽 4시까지 잠에 들려고 노력하는데, 5시 즈음 되면 모든 걸 포기한다. 그때부터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를 켜 드라마를 본다. 방의 불을 키기 위해 일어나긴 귀찮다. 어두운 밤에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영화를 보니 눈이 나빠지는 건 당연지사다. 하, 이 비루한 덩어리에 안경까지 끼면 그야말로 대참사다. 눈이 더 나빠지면 꼭 라섹을 하고 말리라. 안경을 안 끼는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새벽 5시 즈음되면 해가 밝아온다. 눈을 부비고 창밖을 보면 이게 새벽인지, 아침인지, 밤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수 없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일 수도 있고, 해가 지는 저녁일 수도 있다. 언론고시 작문처럼 그야말로 말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뭐가 뭔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단다. 저 단어를 듣고 이준기가 떠오르면 삐빅 당신은 최소 20대 후반입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의 뿌리는 프랑스에 있다고 한다. 저 멀리서 오는 사물이 나를 위한 똥강아지인지, 나를 죽이러 오는 늑대노무쉐키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알러지 때문에 개는커녕 먼지에도 민감한 나로선 둘 다 재앙이다. 아아, 당신은 내 알러지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털뭉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요즘 따라 흐릿한 게 많다. 나빠진 눈도 그렇고, 아침 풍경도 그렇고 사회 풍경도 그렇다. 부모는 자식의 본보기가 되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데 요즘 부모는 딸 같아서 성희롱하고 아들 같아서 갑질하나보다. 자기 아들이 똑같은 짓을 당해도 가만히 있고 "허허 거참 좋은 어르신이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시대의 참어른이라고 인정하겠다. 


학교에서는 남의 것을 표절하지 말라고, 표절한 사람은 학자로서 아니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윤리를 저버린 것이라고 배웠는데, 요즘에는 잘도 기어 나온다. '구국을 위한 결의'라고 과거를 용서해달라고 말하는데, 용서는 나라가 해주는 게 아니라 피해자가 해주는 거다. 일로써 보답한다는데 어느 시대에 본인 커리어 개발이 용서를 구하고 사회에 죗값을 치러 보답하는 길이 되었는가 싶다. 박정희 때나 지금이나 '구국'만큼 좋은 세탁기 브랜드가 없다. 


새벽에 본 <미생>에서 부장 아저씨가 욱해서 동료 직원을 밀친 오과장한테 그러더라. 사람 때리는 거 아니라고. 말못하는 짐승 괴롭히는 거 아니고, 친구 괴롭히는 거 아니고 사람 때리는 거 아니라고 6-3-3학제에서 드립다 배웠다. 근데 요즘은 사람 죽이러 간다고 하면 따봉받고, 영웅되고, 열사되는 거 같더라. 지하철에서 라면 끓여먹고 공공장소에서 민폐 끼치는 걸 보면서 수천명이 낄낄대는 걸 보니, 나는 따봉이 낳은 괴물이 되긴 멀었다. 하, 구현모는 아직 배가 덜 고픈가보다. 


뭐더라, 언론은 사회의 공기라고들 많이 하더라. 취업청탁한 국회의원한텐 비판의 감시견이 되던 언론인이 본인 자식 취업청탁 문자 앞에서는 충견이 되더라. 저런 분들이 20대 청년들 인성 면접을 보고, 구직 면접을 볼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요즘 정말 힘들구나"보단 "청탁도 실력이야, 부모를 탓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엔 본보기가 될 어르신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아 무슨 본보기냐고? 일벌백계의 본보기말이다. 


참 흐릿한 게 많다. 윤리의식부터 직업의식까지 옳고 그름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세상은 여러 개의 극이 있는 다극 사회라 선악의 이분법으로 해석하면 안된다라고 생각하지만, 최소한의 윤리마저 무너진 느낌이다. 이쯤되면 경계를 뚜렷하게 나누어 기는 기고, 아닌 건 아닌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비정상인가보다. 


5월 대선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적폐청산을 외쳤다. 적폐청산 시간이긴커녕 개와 늑대의 시간인 것 같다. 전국에 8명밖에 없는 4성장군부터 정부기관 그리고 언론과 스트리머까지 온갖 곳에서 윤리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세상이 썩은 건지, 썩었다고 생각하는 내가 썩은 건지 그 경계마저 흐릿해진다. 



아아, 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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