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겠네..
"하하야 ,힘내!” , “힘내라고 하지 말라구!”
김태호 PD에게 “PD 마인드를 가진 연기자”라는 극찬을 받고, 국민 MC 유재석의 파트너로 지상파 프라임 타임의 예능 2개를 맡은 하하도 저런 이야기를 듣던 시절이 있었다. 때는 2010년, 공익근무요원으로 병역의 의무를 마친 하하는 무한도전에 복귀했으나 바뀐 예능 흐름에 적응하지 못해 물과 기름처럼 겉돌던 시기였다.
그런 하하에게 새로운 캐릭터가 생겼다. 바로 ‘동정 받는 꼬마’였다. 박명수와 유재석 등 무한도전 동료들은 겉돌고 부진한 하하에게 힘내라고 말하면, 하하는 본인은 괜찮으니까 동정하지말라며 동정에 화를 냈다. 노력하지만 겉돌고 있는 하하에게 동정하는 구도가 웃겼고, 그 동정에 힘이 빠져 오히려 화를 내는 하하도 웃겼다. 영원한 캡틴인 박지성마저 한 인터뷰에서 하하에게 힘내라고 할 정도였으니, 꽤나 재미와 흥행 모두를 잡은 유행어였다.
근데, 대체 하하는 왜 화를 낸 걸까?
주는 사람의 뜻이 어쨌든 간에 동정은 동정 받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힘내라는 말도 한두 번만 들어야지, 주구장창 들으면 오히려 힘만 빠지기 때문이다. 받는 사람 입장에선 “나 힘내야 하는 건가?”, “내가 그렇게 동정 받을 사람인가?”, “나 그렇게 힘든 위치에 있는 건가?” 등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잘 살고 있는 본인의 삶이 부정당하는 기분도 든다. 힘내라고 하는 사람 입장에선 선의일지라도,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들으면 귀에는 딱지가 앉고 마음엔 화딱지가 앉는다.
게이 군인이, 게이라는 이유로 함정수사를 당하고, 게이라는 이유로 감옥에 가야만 했다.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말했다. 게이라 불쌍하고, 레즈비언이라 불쌍하다고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게 하필 동성이라 안타깝고 불쌍하다고 말이다. 역으로 물어보자. 언제부터 게이이고, 레즈비언인 것이 불쌍하고, 동정받아야 하는 일이 되었을까. 법적으로 부부가 되지 못하고, 동성을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사탄이 되고, 에이즈의 주범인 것마냥 묘사되는 건 화낼 일이지만, 동성을 사랑하는 것은 절대 동정받을 일이 아니다.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어쭙잖은 동정은 선의에서 출발했을지언정 악의를 낳고야 만다. 이유는 간단하다. 착하지만 값싼 동정은 그 사람의 자율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동정과 시혜는 받는 사람의 결정권을 박탈한다. 마치 그 사람이 혼자선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하는 그저 그런 약하디 약한 존재로 보이게끔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율적인 행위와 감정을 그저 안타까운 것으로 보는 시선은 그 사람을 오히려 애처롭게 비추며 애처로운 시선을 그 사람들을 다시 약하게 만든다. 결국, 공감이라는 착한 뜻에서 나왔지만 자율성을 무시하고 미약한 존재로 만드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이렇듯,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값싼 동정과 연민의 역사는 길다. 역사가 길다고 썼지만, 사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아직까지 장애우라는 표현도 널리 쓰이고 있다. 당장 구글에 ‘장애우'를 검색하니 서울신문과 한국일보, 노컷뉴스와 JTBC 등 정파성을 가리지 않고 많은 언론사가 장애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언론사가 그렇게 많이 쓰지만, 사실 장애우라는 단어는 장애인들이 꺼려하는 표현이다. 지난 2015년,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장애인들은 장애우라는 표현 대신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좀 더 멀리가면, 2002년 한겨레의 여론칼럼 ‘왜냐면'은 “‘장애우'란 표현 쓰지 마세요"라는 이름의 칼럼을 받았다.
대체 장애인들은 왜 정없는 장애인이라는 단어 대신에 친근한 장애우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반대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장애인을 친근하게 만드는 장애우라는 단어를 권장하는 운동이야말로 장애인을 약하게 만들고 차별하는 의식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장애인은 왜 우리의 친근한 친구가 되어야 하는가. 친근하고 동정 받는 시민은 우리와 동등한 시민이 아닌 2등시민일뿐이다. 결국, 동성애자와 장애인을 동정하는 시선은 그들을 이성애자와 비장애인에 비해 2등시민이라는 인식을 깔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값싼 동정은 싼만큼 비지떡이다. 값싼 동정은 사회의 소수자를 마치 다수의 도움없인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약자로 만든다. 그 값싼 동정은 우리의 값싼 의식때문이다.
억압받고 있는 소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값싼 동정과 시혜가 아니다. 그들을 불쌍하고 궁휼하게 여겨 안타깝다고 느끼는 다수자들의 시선은 오히려 그들에게 방해가 될뿐이다. “내가 힘내야 하는가"라는 궁금증은 “내가 그렇게 불쌍하고, 동정받고 약한 존재인가"라는 자조적 괴로움을 낳는다. 잘나가고 웃긴 친구 노홍철의 동정 어린 눈빛이 못나가고 친구에 비해 조금 모자라는 듯한 하하를 더욱 괴롭혔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과 시혜 어린 시선이 아니라 동등하고 자율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개인의 자존감은 스스로를 인정하고, 본인의 행동이 본인에 의한 것임을 깨달을 때 높아진다.
값싼 동정은 싼만큼 비지떡인데, 오래 가지도 못한다. 값싼 동정의 유효기간은 우리네 첫사랑의 기간처럼 길지 않다. 매우 짧다. 이슈가 터질 때마다 잠깐 나올뿐, 길게 가지 못한다. 깊은 공감과 이해에서 나온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값싼 동정은 얼마 가지 못할뿐더러 깊지도 않다. 얕은 시선은 얕은 생각을 만들고, 얕은 생각은 어떠한 행동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변화를 만들지 못한다.
값싼 동정과 어쭙잖은 연민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이 가장 먼저 시행되어야 하는지는 잘 알겠다. 일단 장애인과 성소수자와 같이 사회에 힘없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한 시민으로 보아야 한다. 안타깝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같은 사회를, 같은 시기에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소수자를 우리와 동등하지 않은, 도움받아야 하는 시민으로 보는 것은 그들을 2등 시민으로 만든다.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우리의 분노는 차별을 향해야 한다. 동등한 시민인데도 불구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없음에 화내야 한다. 차별에 대한 분노로 향하고 그 차별을 정당화하는 많은 것들에 화를 내야 한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차별 받는 그들의 처지에 분노해야 한다. 분노의 방향은 그들을 차별하는 제도권이다. 분노에서 시작되었을지언정 결과는 건설적이어야 한다. 분노에서 출발했을지언정 제도권에 대한 소리침은 건설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생활동반자법, 동성결혼허용 등 다양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제도권에 대한 대만인의 분노는, 동성결혼 합법화를 이루어냈다. 어쭙잖고 하찮은 동정과 시혜보다 깊이 있는 공감을 바탕으로 한 제도적 개선이 대만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로 만들었다. 같은 시기 한국은 게이 군인을 감옥으로 보냈다. 성소수자들은 분노하고, 비성소수자들은 그런 성소수자들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동정했다. 어떻게 해야 이 현실이 나아질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동성애자를 동정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눈빛보다 그들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우리와 동등한 그들을 차별하는 제도에 대한 분노와 묵묵한 후원과 건설적인 토론이 더 큰 도움이라는 것말이다.
- 이 글은 LEDEBUT 36호 (ledebut.kr)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