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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Sep 06. 2017

@: 마광수 + 나는 길들지 않는다

나는 길들지 않는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불쾌했다. 이미 이룬 사람이 자립을 운운하며 자영업을 하라든지 술과 담배에 의존하지 말라든지 귀농하라고 말하는데, 비정규직으로 사회 초년생을 시작하는 시대엔 허망한 소리다. 허망한 소리도 예의를 지킨 표현이고, 걍 말 같지도 않은 말이었다. 일본의 황국군이 2차 세계대전 때 정신력 운운하면서 개돌한 게 겹쳐보이더라. 망한 나라는 다 망할 이유가 있다. 


현실에 분노하고, 순응하지 말라고 하더라. 근데, 분노는 사치품이다. 하루하루 살아남기도 바쁜 사람들은 분노할 여유도 없다. 매일 일에 치이고,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하기도 바쁜데 무슨 분노냐. 분노, 호기심, 상상력, 감수성 모두 사치재다. 우리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도 벅찬 사람이 대부분이다. 내 삶에 관계되어 있는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버리고 온전하게 일어서기 위해선 특정한 감정이 필요하다. 자립은 감정 위에 서있는데, 그 기반 감정 중 하나가 분노다. 분노하지 않고선 남들을 버리기 어렵다. 분노하지 않고선 종속된 현재를 버리고 자립할 수 없다. 


그런데, 요즘 사회는 분노할 기력도 뺏어간다. 비정규직, 계약직, 에디터, 디지털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안한 계약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그들에게 버티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준다. 그렇게 1년, 2년, 3년. 그들에게 남은 건 무엇인가. 없다. 그럴싸한 이름으로 불안전 노동에 빠져있는 사람은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그리기도 힘들다. 그와중에 무슨 분노고 자립이냐. 그렇게 힘든 와중에 터져 나온 분노는 멀쩡하지 않다. 약자의 목소리를 지우고, 약자를 향한 손가락질이 구조에 대한 분노를 대체한다. 


저자는 자립이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한다.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라고 하는데, 이 역시 사치재 아닌가. 자립에 대한 상상은 꿈만 같다. 꿈꾸기만 해도 벅차던 시절에서 꿈을 짓밟고 일어서는 시절로 바뀌었다. 자립에 대한 상상이 꿈이라면, 그건 곧 짓밟힐 상상이다. 철창 바깥을 그리는 상상력, 그 한 소쿠리의 상상력마저 지키기 어렵다. 


스스로에 대한 혁명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300% 동의한다. 본인의 안정을 버리고 새로운 무언가를 향해 떠날 때마다 인간은 발전한다. 그것이 중국어를 배우는 자기계발이든, 자아의 성장이든 간에 편안한 지금을 떠나 다소 불안한 나중을 향해야 인간은 발전한다. 새로운 나를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나라는 세계를 넓힐 수 있다. 혁명이 세계사의 변곡점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혁명이 필요한지는 아래의 질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지금의 나로서 만족할 수 있는가? 지금 행복한가? 지금 내 모습에 만족하고 있는가? 괜찮은가? 내가 그렸던 삶의 목적, 내 존재의 이유와 내가 서있는 위치 그리고 그 방향을 비교해야 한다. 


저자는 모든 것이 나에게서 출발하는 온전한 개별체로서의 삶이 자립이며, 자립하는 젊음이야말로 가치있다고 말한다. 이 구절을 쓰는 와중에 마광수가 떠올랐다. 도발적인 표현으로 호박씨 까는 사회를 고발한, 위선적인 사회의 뒷통수를 때린 그였다. 


예나 지금이나 모난 돌은 정맞는데, 마광수는 모 그 자체였다. 그의 문학은 학계와 문단에서 버림받았으며 국가는 그를 구속했다. 죄명은 있었지만 본질은 하나다. 위선적인 사회에서 솔직했다는 죄목이다. 그는 에이즈라 불렸고, 사랑과 성행위를 모른다고 말했고, 심지어 성애를 모욕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미 떠난 사람에게 이런 칭찬을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그의 화려했던 청년기는 그야말로 자립한 젊음이었다. 문단, 학계, 국가, 사회를 신경쓰지 않고 스스로 적확하게 판단해 온전히 본인의 말을 풀어냈다. 


하지만 사회는 그를 길들지 못했다. 그는 꾸준히 말을 했고 글을 썼다. 비록 음란한 교수라는 오명을 받았지만 그는 생존했다. 쓸데없이 본인의 과거를 미화하지도 않았고, 현실에 대한 소회만을 담았다. 과거에 종속되지 않고, 문단과 학계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세상을 사는 기본이 마광수 세 글자에 있었다. 그를 지배할 수 있던 것은 열렬했던 사랑이자 말미에 느꼈던 우울함이었다. 


고민 많고, 신경 많이 쓰고, 눈치 보고, 내게 집중하지 못하는 불순물로서 그의 순수했던 삶을 동경한다. 윤동주를 발굴한 학자, 한국사에서 가장 음란한 소설가, 괴인, 시대를 앞서간 자유인, 개인의 자유를 탐닉한 자 등 다양하게 불리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자립한 젊음이었다. 그가 했던 사랑과 그가 겪은 우울을 존중한다. 그의 삶을 존중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래는 발췌 문구. 두번째 단에 있는 건 내가 적은 메모. 

* 젊음은 곧 자립이다. 자립이란 적확한 판단이다. 판단은 자신의 소망과 욕망에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바라보고 주변을 파악한 후에 정확성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 정부는 자립적이지 못하다. 맨날 공론에 맡기거든.

* 대학 축제의 추억담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세계에 갇히고 만다. 그것은 이미 인생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생활이다.
        * 과거로 향하는 대화와 인생은 망한 것. 

* 당신은 바로 당신이 있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사는 기본은 거기에 있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인생의 기반과 원점이 확고하게 거기 있어야 친구도 있고,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국가도 있는 것이다. 

* 누가 폭력을 가하며 강요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집단과 조직에 팔아넘기면서 이용당하고 종속당하는 타율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 지금의 나여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자문을 도저히 지우지 못하는 당신을 상대로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날으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 독자적으로 사는 목적이 없는 자는 그것이 있는 자에게 휩쓸리게 되어 있다. 평생을 이용당하며 산다. 

* 당신은 자신의 힘으로 전력투구하면서 인생을 진정한 감동의 색으로 물들여야 한다. 

* 애당초 자신이 아닌 것에 매달리려 한 것 자체가 큰 잘못이다
    * 생각과 판단의 외주화. 그럴싸해보이는 것에 판단을 맡기면 안된다. 무엇을 바라는가, 그 바라는 것으로 기준을 성립하고 생각해야 한다

* 속지 않아야 한다. 속지 않으려면 모든 권력과 권위를 의심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필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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