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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Sep 17. 2017

껍데기 뒷이야기 : 껍데기 뒤 상처들

내가 아직 안 올렸나?

시작은 미비했다. 


“외모 콤플렉스 있으신 분들, 외모 때문에 고통받으셨던 분들 메시지 하나 주세요! 라는 한 마디에 수십 개의 메시지와 카톡을 받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야기는 다양했다. 여유증에 걸려서 놀림거리가 된 남성분, 우울해 보인다는 외모로 인해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잘리신 분, “왜 이렇게 남자처럼 입냐, 여자처럼 입으면 얼마나 이쁜데”라는 고나리질을 하루에도 여러 번 듣는 분, 남자인데 외모에 관심을 가지니 “저 새끼 게이네”를 듣고 외모를 좀 꾸미려고 여동생이랑 화장품을 공유하니 “저 새끼 여동생이랑 근친이네”라는 악소문까지 퍼졌던 분 등등. 대선 후보의 출정식에 게이 연예인이 출연하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그 촌스러운 외모지상주의식 언행은 만연하다.


그런 분 중 몇몇과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하거나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껍데기]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인터뷰를 했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한 분 한 분의 증언은 그들 각자의 상처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공통으로 2가지뿐이었다.


외모 자본, 죽거나 혹은 죽이거나 


그중 한 가지는 현실에 순응해, 외모를 가꾸어서 계층을 상승하는 것이다. 본인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외모를 끊임없이 가꾸어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는 방법이다. 몇몇 인터뷰이는 콤플렉스가 되었던 본인의 외모를 계기로 자기 가꾸기에 충실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붙이고, 깎고, 오리고, 잘랐다. 보기 싫은 여드름은 가리고, 부정확한 치열은 숨기고, 사각 모양의 턱은 원형으로 깎아냈다. 하지만 마냥 슬프고 비참한 선택만은 아니었다. 사람은 항상 변하게 마련이고, 외모 역시 사람의 일부 중 하나다. 어쨌거나 그들은 변화했고, 콤플렉스를 이겨냈다. 명심하자.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가장 쉬운 길은 열등한 나를 지우고, 우등한 나를 그리는 일이다.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말은 콤플렉스의 세계 바깥에서 할 수 있는 평화로운 이야기다. 콤플렉스는 전쟁터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중지하기보다, 총을 쏘길 선택했다. 지배받는 지배자다.


나머지 한 가지는 그 전쟁터의 외곽으로 뛰쳐나오는 길이다. 그들의 고나리질과 싸우기는 힘들지만, 모든 걸 포기하고 염세적으로 바라보고 외곽으로 빠지면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은 이 구조의 모서리로 향하며 아웃사이더가 된다. 구조가 원하는 상과 자신의 차이를 알며, 구조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 알기 때문에 그들은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구석으로 빠져나와 그들만의 길을 찾는다. 비록 그 길은 구조를 바꾸는 길은 아니지만, 개인의 안위는 지킬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회의적인 방관자가 되었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지배받는 지배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현재의 구조를 인정하고, 오히려 순응하는 꼴 아닌가. 몇몇 인터뷰이는 실제로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이들에게 관리하라고 주문하고,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극복한 자의 경험담이니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사회경제적 문제로 치환한다면 소위 “노오오오력” 담론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회의적 방관자는 어떠한가. 그들 역시 이 구조의 피해자이긴 하나, 구조를 바꿀 수 없다는 염세주의적 판단으로 이미 구석으로 도망친 것 아닌가. 불량스러운 외모라며 자신을 뽑지 않은 편의점 주인을 이해한다거나 “나 같아도 그랬을 거 같다”는 표현은 너무나 순응적인 게 아닐까. 개인의 안위만을 돌보는, 변화의 의지를 잃은 회의적 방관자를 마냥 긍정할 수 있을까. 모든 개인이 투쟁하고 운동을 할 필요는 없고, 당위도 없으나 조금이나마 도전해보는 게 좀 더 나은 사람의 상 아닐까.


아쉬움과 의문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분노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그들은 그들이 갖고 태어난 외모로 인해 사회에서 이류 시민 혹은 패배자 혹은 왕따 등으로 낙인찍혔다. 앞길이 구만리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젊은 20대들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끊임없는 생존과 버팀 그리고 극복의 연속이었다. 극복과 생존을 통해 얻은 나름의 결론을 구조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이 없다는 이유로 마냥 비난하거나 비판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콤플렉스를 100% 이해할 수 없는 관찰자인 나로선 그것이 그들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존중이었다.


반항, 멀고도 험난한 이름


페이스북 메신저, 애스크드, 카카오톡, 인터뷰 등을 통해 수많은 그들이자 우리를 만난 지 1주일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콤플렉스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차별과 평가를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콤플렉스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또 다른 이름은 우리다. 그들에 대한 감상을 조용히 기록하고 있는 와중에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꼼꼼하게 압박하는 걸까”라는 의문 말이다. 외모지상주의, 외모 차별이라 불리는 수많은 껍데기에 대한 평가와 차별 그리고 낙인찍기가 얼마나 철저하기에 그들은 저항의 의지도 거세됐을까.


과거를 생각해보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새 학기가 시작되면 남자애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여자애들의 얼굴과 몸매를 평가한다. “쟤는 봉투 씌우고 하면 딱 맞는데”, “뒤 돌려놓고 하면 좋을 텐데”, “우리 반에서 1등은 쟤고 2등은 넌데 난 솔직히 네가 더 이쁘다고 생각해”, “여자가 뭐 그렇게 옷을 입냐” 등의 증언은 우리들의 인터뷰이에게서 나왔다. 보통 피평가자이자 피해자인 여성들도 구조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다. 여자애들도 남자애들 평가는 한다. “여자가 쌍꺼풀은 있어야지”, “살 좀 빼라”, “야 그렇게 입으면 남자애들이 싫어해” 등의 증언도 있다. 대학에 가더라도 비슷한 꼴은 반복된다. 꼴은 얼굴을 속되게 이르는 단어다. 꼴에 대해 품평하고, 꼴에 대해 점수를 매기고, 나아가 꼴을 고치고 뜯으려는 꼴은 반복된다. 흠집은 파이고, 파이고, 파인다. 그렇게 사소한 콤플렉스는 눈덩이와 같이 극복하기 힘든 트라우마가 된다.


구글에서 외모지상주의를 검색했다. 사회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외모 역시 경쟁이 한 요소로 받아들여졌고, 나아가 외모를 주요 잣대로 보는 게 자연스러워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지난 20년 동안 외모를 신경 쓰는 비율도 높아졌다는 기사도 나왔다. 나이가 젊은 사람일수록 외모에 대한 불안감도 높다고 한다. 비교하고 집단적인 문화에서 자라난 우리는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아주 사소한 것마저 경쟁의 요소로 치부한다. 그중 하나가 외모다. 생각해보면 외모와 직무의 연관성이 있는 곳이 얼마나 있겠는가. 자신을 끊임없이 개량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불안마케팅을 하는 사회다.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외모도 주요 잣대가 되고 그로 인해 외모를 신경 쓰는 비율도 높아졌는데, 젊은 사람들이 심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청춘들은 얼마나 더 아파야 할까.


물론, 해외라고 안전한 건 아니다. 해외에서도 외모 평가와 외모 차별은 만연하다. Lookism이란 단어가 버젓이 영어로 존재한다. 메시지를 보낸 이 중 몇몇은 해외 유학생이었다. 그래도 한국보다 덜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교에 얽매이지 않고 남에게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는 물론이요, 한국보다 이러한 담론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바람


뜯어고쳐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타인의 잣대를 너무나 신경 쓰고, 역으로 타인을 너무나 쉽게 평가하는 문화부터 ‘미인상’ 혹은 ‘미남상’이라고 불리는 정답만을 강요하는 문화까지 전부 문제다. 문제는 많은데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을 보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이러한 콤플렉스 만드는, 그러니까 술을 권하고 콤플렉스를 만들게 하는 사회를 얼마나 버텨야 할까. 콤플렉스 때문에 지친 사람을 패배자, 약자로 낙인찍는 사회도 얼마나 버텨야 할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사회이기도 하다.


인터뷰의 후기가 염세와 회의로 점철된 듯해서 가슴 아프다. 단순히 긍정적으로 구조를 바꾸자고 말하기엔, 너무나 많은 문제가 얽혀있다. 알고 있다. 편견 없는, 차별 없는 진정한 사회는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토피아다. [껍데기] 프로젝트가 원하는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우리가 만난 수많은 인터뷰이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꽃길만 걷고, 행복하게 살아도 모자랄 판에 왜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는 상처의 굴레에 못 넣어 안달일까. 그저 남들을 상처 주지 말고, 자신을 너무나 옥죄이지 말자고 하는 것뿐이다. 나아가 외모는 껍데기뿐이고, 있는 그대로의 능력을 평가하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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