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삶이 B와 D사이의 C라하지만 대부분의 선택은 탄생과 죽음이 아니라 사회와 나 사이에 있다. 그 선택의 대부분은 사회로 귀결된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 바깥에서 살기 힘들고, 평생 사회화를 겪기 때문이다. 평생 학습의 다른 말은 평생 사회화다.
사실 사회화가 항상 나쁘진 않다. 문제는 그 사회화가 개인의 자아를 죽이기 때문이다. 화목한 가정은 구성원 개개인의 자그마한 노력이라고 쓰고 희생이라고 읽는 행위를 조장한다. 사회는 학교와 기업 그리고 가정을 통해 개인을 등수와 사회의 잣대로 평가하는 문화를 장려한다. 가고 싶은 대로 가면 바보 소리를 듣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치욕을 겪는다. 죽을 만큼 노력해야 사회의 박술르 받는다. 문제는, 그 노력이 개인을 철저히 굴복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른은 사회화를 끝마치고 레디메이드로 사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가지각색, 다양한 모양을 가진 사람들이 어른만 되면 다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생김새만큼 다양한 꿈을 꿨던 아이들은 돈과 승진 그리고 자녀의 명문대 입학을 바라는 흔한 아저씨와 아줌마가 된다. 불꽃 같던 청춘은 코카콜라와 같은 공산품이 됐다. 공산품이 된 인생은 퍽퍽하고, 재미없고, 김빠진다.
주체성이 중요하다. 주체성이 무엇이냐 물으면, 사회의 일방적 협박에 굴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바를 알아내고 성취하는 성격을 의미한다.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한다는 문장은 유치해보이지만, 무시 못할 만큼의 진실을 담고 있다. 사회의 흐름을 끊고 본인의 흐름으로 살아가는 과정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삶이다.
주체성을 잃고 휩쓸리듯 사는 사회일수록 삼미슈퍼스타즈가 각광받는다. 경쟁의 척도를 무시하고, 본인의 흐름대로 플레이하던 그들이다. 저자는 삼미 슈퍼스타즈가 평범하게 살아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치욕을 받았다지만,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다. 흔한 필부들은 사회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그것이 마치 엘도라도에서 나온 금맥인 것처럼 받든다.
저자는 다시 묻는다. 독자들은 삼미 슈퍼스타즈가 되고 싶은지 혹은 팬클럽으로 남을지 아니면 그들을 패배자라 생각할 것인지 말이다. 팬클럽은 싫다. 대개 팬클럽은 본인의 생각과 삶의 가치관을 스타에게서 찾는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매우 바람직한 삶의 가치관을 가졌지만, 내가 직접 살지 않는 이상 의미없다. 그들을 패배자로 삼는 관객은 더욱 되기 싫다. 비겁하다. 남은 건, 직접 뛰는 거다. 그 뛰는 건 삶의 주체성 회복을 위한 러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