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됐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됐냐고 말이다. 어쩌다 가수 이승환의 토크 콘서트에 게스트로 초대되어 성덕이 되고, 어쩌다가 미스핏츠를 하게 됐으며 어쩌다가 그런 뉴미디어에 기웃거리게 됐냐는 질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뭐라 할 말은 없었다. 운이 좋았다. 그게 내 답이었다.
운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 장면이 생각난다. 중학교 3학년 때였나. 어느날 갑자기 발목이 시큰거려서 정형외과에 갔다. 반깁스를 하고 나왔는데, 다음 날 발목이 너무 아파서 다시 병원에 갔다. 발목에 염증이 생겨서 열이 나는 줄 알았는데, 의사 선생님이 내 체온을 재더니 큰 병원에 가야겠다더라. 대형병원 두 곳을 들락날락거렸고, 우여곡절 끝에 내 병명을 알게 됐다. 류마티스 관절염 혹은 강직성 척추염. 유전자와 관련됐고 면역체계와 관련됐다더라.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집안에 관련 병력은 없었다. 그냥, 갑자기 폭탄이 생기고 폭탄이 터졌단다. 의사선생님은 내가 운이 나빴다고 말했다. 운도 지지리 없었다.
2014년 2월이었다. 어영부영 인도를 갔고, 중헌이형이랑 창석이형이랑 헤어진 다음에 혼자 겐지스강 근처 계단에 앉았다. 블로거들이 겐지스강을 바라보면 깨달음을 얻는다길래, 무지렁이 중생 구현모도 붓다가 되기 위해 앉아봤다. 깨달음은 개뿔. 들개들이 와서 똥과 오줌을 싸고 짝짓기를 한다. 개를 피하니 소가 온다.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한 소는 계단으로 올라오더니 똥을 싼다. 이럴 거면 왜 씼냐? 싸고 씻어야지 소새끼야.
개와 소가 지나가니, 아이들이 온다. 아이들은 내 근처로 와 엽서를 들고 1딸라를 외쳤다. 루피밖에 없었고, 애초에 살 생각도 없었다. 수능 끝나고 헬스클럽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던 기억이 나서 괜히 미안했다. 미안할 필요도 없는데 지은 표정 때문인지, 그냥 내가 못생겨서 그런지, 오늘 하루 장사가 안되어서 그런지 아이들은 대놓고 Fuck you를 외치고 돌아섰다.
아, 생각하니 운이 좋았다. 인도 빈민가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집안이 궁핍해 당장 생계에 뛰어들 필요도 없었다. 등록금은 내 돈으로 냈지만, 어쨌거나 부모의 생계를 20대부터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나름 좋은 처지다. 미스핏츠를 좋게 봐준 많은 분들이 나를 불러주셨고, 기회도 주셨다. 미스핏츠부터 지금까지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나쁜 사람들도 만났지만, 좋은 사람들만 남았다. 다행히, 그들이 날 버리지 않은 거다 (….). 지금은 내 지도교수님이 된 선생님도 학부 때 날 좋게 봐주셔서 관련 장학금도 운좋게 받았다.
아주 가끔 말하는데, 고등학교 때 정한 삶의 마지막 목표는 고아원 건설이었다. 부모라는 최소한의 울타리도 없던 아이들에게 울타리를 주고 싶었다. 외고라는 프리즘으로 본 세상에 대한 치기 어린 반항이었다. 울타리가 없는 아이들도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고, 좋은 삶을 살면 그게 좋은 세상이 아닐까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이브한데, 그땐 진짜 그렇게 믿었다.
그렇다. 내가 어쨌거나 여러 일을 하면서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을 사주고, 과외돌이에게 이러저러한 조언을 하고 대학원 친구와 통영을 여행하고 트레바리를 하고 그런 것들 전부 결국 내 운이 좋아서다. 성서처럼 개연성 없는 일은 아니지만, 나의 노력은 행운과 행운을 잇는 아주 조금의 연결고리뿐일 거다. 애초에 인도 빈민가에 태어났으면 그런 기회도 없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고, 비슷비슷한 이유로 행복하다. 각기 다른 얼굴을 한 불행을 줄일 수 없지만, 비슷하게 생긴 행운을 늘리고 싶었다. 내가 누린 여러 기회가 단순히 행운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함이었으면 했다. 오늘 트레바리에서 행운의 제도화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걸 바랐다. 내가 얻은 기회가 요행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이면 한다.
혹자가 종교를 물으면 왼손엔 자본주의, 오른손엔 기회주의를 달고 산다고 답한다. 기회주의자라 그런지 꿈이 자주 바뀐다. 요즘은 누군가를 봐주는 일을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끄적임으로 남을 수 있는 그림이 웹툰이 되고, 쓰잘데기 없는 글이 책이 되고, 의미없는 허무로 끝날 많은 일들이 의미있게 되는 과정엔 봐줌과 기회가 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동정이 아니다. 의미를 부여하고 만드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기회를 주고 내 행운을 나눠주는 일. 내가 받은 만큼, 나누고 싶다는 생각. 그거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없더라.
자러 가야지. 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