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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Mar 28. 2018

레이디 버드 : 나를 만나기 위한, 고맙다고 하기 위한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나는 위성이다 


태양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사실 지구는커녕 달과 같은 위성이기 마련이다. 항상 누군가가 되고 싶어 했지, 스스로에 만족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공부 잘하는 사람을 동경했고 이제는 돈도 많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을 동경한다. 어찌 보면, 난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의 위성일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 애처로운 사실 한 가지는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별해 보였던 나는 너무나 평범했고, 이 사실은 너무나 애처롭다. 내 인생의 여러 선택을 주체적으로 할지언정 이 사회 속 나는 흔한 사람 중 하나이기에 혹자는 우리를 세상 속 먼지로 비유한다. 나라는 세계가 사실 흔하디 흔한 먼지였다면 얼마나 슬플까. 


너무나 뻔해 보이는 이 사실이 슬프고 절망스럽게 다가오는 시기가 사춘기다. 지금에서야 ‘중2병’이라 부르며 희화화하지만 그때의 우리가 겪는 좌절과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마주하고 슬퍼하다 마침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우리는 성장통이라고 부른다. 사춘기는 공평하다. 누구에게나 좌절을 안겨주고, 그만큼의 성숙을 가져다준다.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 


영화 <레이디 버드>는 주인공 크리스틴이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크리스틴은 스스로를 부정한다. 잡지 속 모델이 되고 싶고, 학교의 잘 나가는 일진이 되고 싶다. 크리스틴에게 ‘지금’과 ‘나’는 항상 부정해야만 하는 단어다. 그 단어를 긍정하는 순간, 스스로가 평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리스틴은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 대신 본인의 예명을 택한다. 가톨릭 학교에서 치러진 세례식에서 “It was given by myself to myself”라며 당당하게 예명 ‘레이디 버드’를 말한다. 


크리스틴은 불만이 많다. 잡지 속 모델처럼 마르고 싶고, 학교 일진 여자애처럼 부잣집에 살고 싶다. 잘 나가고 싶은데, 잘 나가지 못해 문제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태어나고 살아온 동네 ‘새크라멘토’가 밉다. 집과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에 가고 싶지만, 학비도 문제고 성적도 문제다. 평범한 지금을 떠나 특별한 어딘가로 가고 싶다. 지금은 문젯거리다. 온통 문제밖에 없는 지금을 탈출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지금을 부정해야만, 살 수 있었다. 



나를 벗어나기 위해 나를 규정하던 친구를 버렸다. 크리스틴은 자기와 같이 다니던 친구를 모른 체 하고, 일진의 옆에 간다. 일진과 친해지기 위해 학교 담당 수녀님의 자동차에 짓궂은 장난을 치고, 센 척하고 싶어 성교육 강사에게 상스러운 욕을 한다. 일진의 패거리에 들어가고 싶어 좋은 집에 산다고 거짓말한다. 하지만 거짓은 쉽게 들통나고 허무하게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일진에게 거짓말은 들통나고, 믿고 모든 것을 준 남자 친구는 거짓만을 주었다. 


크리스틴은 본인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 시절로 돌아가고자 한다. 절교했던 친구에게 다시 다가가고, 좁고 가난하다며 부끄러워했던 가족에게 돌아간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크리스틴은 가장 행복했고, 그때야 말로 크리스틴에게 최고의 순간이었다.  


고등학교 세례식에서 예명을 불렀던 크리스틴은 대학교 진학 후 처음 간 교회에서 “엄마, 나 크리스틴이야”라며 부모에게 전화한다. 스스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든 거짓 페르소나 <레이디 버드>에서 벗어났다.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진실된 나인 <크리스틴> 이 되기로 했다.  



고맙다는 그 한 마디 


영화 <레이디 버드>는 주인공 크리스틴의 성장 영화인 동시에 가족 영화다. 가족 영화의 대명사 <리틀 미스 선샤인>이 떠오를 정도로 따뜻하고 갓 세탁한 이불처럼 산뜻하고 포근하다. 이 영화의 중심엔 누구나 눈물 흘릴 수 있는 공감대가 있다.  


늘 함께 있어 소중한 걸 몰랐던 거죠라는 H.O.T. 의 <빛>의 한 구절처럼 가족은 흔히 ‘소중하지만 소중한 줄 모르는’ 존재다. 특히 자식에게 부모의 존재란 그렇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니 당연히 잘해주어야 하며, 부모가 나에게 해주는 것은 부모로서 당연하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당연히 해야 할 일보다, 내가 받아야 할 일이 먼저 다가온다. 인간은 그렇게 이기적이다.  


오히려 부모를 부끄러워했던 순간이 많다. “우리 형은 10살이야”, “우리 형은 25살이야” 라며 형으로 대결하던 초등학교를 지나면, 그 친구의 집안이 보인다. 아빠의 직업이 보이고, 엄마의 외모가 보인다. 친구네 아버지보다 초라해 보이는 아빠가 부끄럽고, 친구네 엄마보다 꾸미지 못하는 우리 엄마가 부끄럽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를 부끄러워 한 나도 부끄럽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무언가 직업이 있었다. 그 직업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항상 아버지는 가족 소개서에 “자영업이라고 적어라”라고 하셨다. 어쩌면 그 세 글자는 아버지의 마지막 자존심 혹은 하나뿐인 아들을 배려하는 마음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 가기 싫다며 징징대던 나는 소리를 지르고 울며불며 뛰쳐나왔고, 아버지는 나를 붙잡고 “학교 끝나고 PC방이라도 갔다 와”라며 삼천 원 정도를 쥐어주셨다. 등굣길엔 학생들이 많았다. 울고 있는 내 얼굴보다 양복을 입지 않고 추레한 차림으로 나온 아버지가 더 부끄러웠다.  


중학교 때였다. 우리 집 자동차는 엑셀이었다. 정확한 차명은 기억나지 않는데, 학원 끝나고 자식들을 데리러 온 부모들의 자동차에서 우리 집 자동차가 가장 낡았다. 추석 때였나. 학원 특강이 늦게 끝났다. 학원 버스는 이미 운행을 종료했고, 난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학원 선생님이 우리를 데려준다고 하셨다. 난 아버지의 낡은 엑셀보다 학원 선생님의 이름 모를 외제차가 좋았다. 아버지에겐 말씀드리지 않고 학원 선생님의 차를 타고 집에 왔다. 어머니는 나를 꾸중했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허허 웃으셨다.  


부모님이 날 학원에 데려다주실 때, 언제나 ‘한 블록’ 먼저 내렸다. “그냥 여기서 내려줘”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 말의 기저엔 부끄러움이 있었고 부모님이라고 그걸 모르셨을 리 없다. “그래? 그래 밥 잘 챙겨 먹고”라고 말씀하실 뿐이었다.  


고등학교 때였다. 아버지의 직업은 ‘용달’ 내지 ‘택배’라 불렸다. 어느 회사와 아파트의 경비원을 지원했지만 결과는 듣지 못했다. 어느 순간 아버지는 흰색 다마스를 타고 항상 어디론가 배달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옷은 멀끔한 와이셔츠와 양복이 아니라 구멍 숭숭 뚫린 작업복 조끼였다. 항상 땀을 흘리셨기에 아버지의 다마스엔 항상 미지근한 물통과 도시락통이 있었다. 아침엔 냉수였지만, 차 안에서 미지근해져 버린 그 물통과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기 위해 싸간 도시락통 말이다.  


달라진 점 하나는 내가 더 이상 아버지의 직업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의 아버지는 의사, 변호사, 원장, 교수 등 화려했다. 세상에나. 나는 17살이 되어서야 난생처음으로 강남에 사는 친구들을 만났고, 판교에서 통학하는 친구들과 사귀었고, 부모 직업이 ‘~사’로 끝나는 아이들을 보았다. 솔직히 말해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걔네들이 사기캐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직업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어찌 됐든 멋지게 살아오셨기 때문이다. 사실 멋짐과 거리가 머신 분이지만, 자신의 청춘을 바쳐 나라는 삶 하나를 일궈낸 사람에게 우리는 어떤 수식어를 달아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 사람을 부끄러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영화 속 크리스틴도 부모를 부끄러워하고 원망했다. 항상 바가지를 긁는 엄마와 낡은 차를 운전하는 아빠를 부끄러워했다. 집은 철로 근처에 위치해 허름하고 낡았다. 엄마는 항상 화를 냈고 아빠는 친구들 보여주기에 부끄러워 항상 학교 멀리에서 내려야 하는 낡은 차를 타고 다녔다. 부끄럽고 싫은 순간으로만 가득 찬 지금을 피하기 위해 크리스틴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아닌 ‘내’가 만든 <레이디버드>를 사랑한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이뤄지지 못할 미래를 사랑하는 셈이다.  


생각해보면, 부모는 보살이다. 엄마는 크리스틴에게 조금 더 돈을 아끼고, 조금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성을 내지만 사실 그거 다 아쉽고 미안해서 하는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는 미안함과 아쉬움을 성으로 풀기 마련이다. 조금 더 어릴 때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수 있다. 부모의 나를 향한 잔소리 중 태반은 사랑하고 미안해서 그렇다는 사실을.  



크리스틴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레이디 버드> 대신 <크리스틴>이라 스스로를 부른다. 스스로를 받아들이며 부모를 받아들였고 부모와 화해할 수 있었다. 엄마는 수십 장을 구겨가며 편지를 쓰고, 크리스틴을 바래다 주고 울며 돌아간다. 크리스틴은 엄마의 편지를 읽고 눈물짓고, 다음 날 눈부신 햇살 속에서 엄마에게 전화 걸어 “고맙다”라고 말한다. 마침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련된,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렇게 보면 너무나 흔하디 흔한 영화다. 부모와 자식 간의 화해를 이야기한 영화는 많고, 성장통을 다룬 영화도 많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대단한 이유는 그 연출이 정말로 세련됐기 때문이다. 단순히 크리스틴과 주변 가족만을 다루지 않고 사회상 전반을 이야기했다. 이야깃거리가 정말 많다. 


영화 속 미구엘은 크리스틴의 오빠지만, 사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백인 부부 사이에 라티노가 나올 리 없듯이, 사실 미구엘은 입양아였다. 영화 막바지에서야 나오지만, 크리스틴의 엄마는 난임이었고 크리스틴은 늦둥이였다. 사실 이거 하나만으로도 영화는 된다.  



미구엘의 여자 친구는 크리스틴네와 함께 산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수적인 집안은 미구엘의 여자 친구가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가졌다며 집에서 쫓아냈고, 크리스틴의 엄마가 받아주었다. 누가 봐도 불량스럽고, 소위 말해 ‘막 나가는’ 인생이지만 크리스틴의 엄마는 조용히 감싸 안았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미구엘의 여자 친구를 받아들여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사는데 누가 가족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크리스틴의 첫 번째 남자 친구는 사실 게이였다. 미션 스쿨에 다니는 게이라니. 그 누구도 그만큼 정체성 혼란을 겪을 리 없다. 그 친구는 크리스틴에게 울면서 사과하고, 크리스틴은 조용히 껴안는다.  


크리스틴의 베스트 프렌드 줄리는 항상 다이어트를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실패하지만 계속 시도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수학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더 이뻐지고 싶어서다. 비록 그 선생님은 본인의 와이프와 함께 너무나 행복하고 줄리는 그저 학생일 뿐이지만 말이다.  



입양, 게이, 새로운 가족, 사춘기 첫사랑 등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영화 안에 넣었다. 지나가는 씬이지만, 모든 씬에 이야기가 풍부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힘을 잃지 않고 우리가 주인공 크리스틴에게 이입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영화 연출(설계)이 잘 됐기 때문이다. 이야깃거리가 많은데 줄거리에 이입이 잘 되는 영화는 보기 드물다. 반대되는 예시 : 저스티스 리그 


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관계


행복해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일까. 어쩌면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 먼저 아닐까.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충분히 사랑해야만 더 오롯이 나를 바라볼 수 있다. 나를 마주해야만 새로운 누군가를 껴안을 수 있고, 더 깊어진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크리스틴은 스스로를 받아들이며 마침내 나아갔다. 


가족은 관계다. 가족에 대한 고민은 사람 사이 관계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가장 좋은 관계는 무엇일까. 사랑, 우정, 가족, 동료 등의 이름은 중요치 않다. 그 관계 안의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 


영화 속 크리스틴의 엄마는 크리스틴이 ‘레이디 버드’라고 불러주길 바라자, 기꺼이 그렇게 부른다. 자신이 붙여준 이름이 아니라 크리스틴이 원하는 대로 불러준다. 이유는 간단하다. 엄마는 항상 크리스틴이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이룰 때 사람은 항상 최고라고 느낀다. 비록, 크리스틴은 레이디 버드를 버리고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택하지만, 그 순간에 크리스틴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족으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이 아니었을까. 크리스틴 엄마의 호명에서 사랑을 느꼈다.  


서로의 행복을 빌어줄 때 관계는 빛난다. 자기를 불러놓고 학원 선생님의 차를 타고 온 내게 말없이 웃어준 아버지의 모습에서, 크리스틴 대신 ‘레이디 버드’라고 호명하는 크리스틴 엄마의 모습에서, 힘들어하는 친구를 걱정해 일부러 시간 내 전화하는 모습에서, 잠들기 전 꼭 전화를 하는 어떤 연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느낀다. 그 위하는 마음이 담긴 관계야말로 가장 건강하지 않을까. 좋은 관계란, 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일이다.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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