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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May 08. 2018

어버이날

청소 글쓰기 부모자식

오랜만에 방을 청소했다. 책상을 정리하자 먼지가 수줍게 얼굴을 드러냈다. 세신사 아저씨가 벅벅 밀듯이 책상을 닦고 책상 위 로션을 재배치했다. 사용하기 편하게 콘센트를 정리하고 1월에 멈춰져있던 달력을 5월로 바꿨다.


가방도 정리했다. 내가 뛰면 짤그락 소리를 내던 가방 속 동전을 꺼냈다. 내일은 저금통을 사고 말리라고 다짐하며 서랍 안에 대충 던져넣었다. 타이레놀, 비타민, 인공눈물 그리고 널부러져있던 펜들을 정돈했다. 뱃가죽이 등에 붙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얇았던 필통은 어느새 벨트가 잠기지 않는 중년의 배처럼 불룩해졌다.


사춘기 청소년은 공간을 통제하며 자의식을 키운다. 문을 닫을 때 "쾅"하고 난 소리가 신경쓰여 뒤늦게 "바람 때문에 그래"라고 말하던 우리의 과거 말이다. 문을 닫고 그 방의 신이 되어 하나씩 통제하며 우리는 효능감을 느끼고 주체 의식을 만든다. 인간은 졸렬하게도 본인이 유사조물주가 되어야만 주체성을 만들 수 있나보다.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 그럴까 (종교적 의미이든, 생물학적 의미이든).


우리가 우울한 일이 생길 때마다 거실이 아닌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 위에서 발버둥치는 이유는 그 곳만이 온전히 내 공간이기 때문이다. 방구석 여포라는 말은 한 줌의 진실을 갖고 있다.


너의 방이 어떻게 생겼냐가 너를 말해준다고 보기 어렵다. 하루를 통틀어 방 안에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방을 청소할 때 개인의 진실이 드러나기 쉽다. 청소란 그 공간을 정리하고 다시 만드는 일종의 천지창조이기 때문이다. 방을 청소할 때 무엇을 어떻게 배치하냐는 개인의 우선순위를 보여주며 그 사람의 취향과 성향 모두를 알 수 있다.


이적은 빨래를 하면서 슬픔을 잊으라고 했고, 혹자는 청소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라고 했다. 어쩌면, 일맥상통.


백지 위에 검은 펜으로 기록을 남기는,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모니터에 바이트를 남기는 글쓰기에 개인의 취향과 성향이 드러나는 매커니즘과 같다. 글을 설계하고 쓰는 행위와 방을 청소하고 재정리하는 행위의 본질은 같다. 진공에 나를 채우는 일이다.  


친구는 내게 꼭 결혼하기 전에 자취를 하라고 권유했다. 서울에 살면 자취가 무조건 경제적으로 손해 아니냐고 되묻는 내게, 그래도 꼭 한 번 해보라고 말하더라.


여전히 자취는 경제적으로 손해고,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어른들의 격언에 절실히 공감하는 나지만 자취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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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페북에 생각이 담긴 글을 썼다. 글쓰기는 너무나 어려운데, 잘쓰는 사람은 너무나 많고 논술과 작문 그리고 자기소개서는 어렵다.


영어로 논문을 쓸 때, 나는 컴마를 자주 쓰는 습관이 생겼다. 항상 교수님이 지적하셨다. 영어논문쓰기 수업의 교수님은 팔뚝이 굵었고, 잘생겼다. 친구들에게 항상 그 교수님은 테뉴어를 받으셔야 하고 연봉은 1억이 훌쩍 넘어야 돼! 라고 강변할 정도로 학생들의 과제를 섬세히 봐주셨다. 사람 새끼 맞나? 싶을 정도로 워커홀릭이기도 했다. 그분은 항상 , and 를 쓰라고 했다. 난 , and보다 , 그리고를 많이 쓰고 있다.


영어 듣기와 쓰기, 그리고 읽기에 대한 욕구가 솟구쳤다.


언제 꺼질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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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이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다룬 콘텐츠를 기획 중이다. 무작정 자녀를 낳으라고, 출산이 애국이다라는 말은 소음이라 불릴 정도로 많다. 반면에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나 적다. 하다못해 학교 성교육에 좋은 부모와 자녀 관계 맺기라도 가르치면 좋겠다. 누가 언제 어떻게 부모가 될지 모르니까(..)


부모 자식 사이의 갈등은 드러나지 않는다. 페이스북에, 카톡방에, 술자리에서 구시렁댈 뿐이다. 그 어느 곳에도 쉽사리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가정폭력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본인의 욕망을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투영하는 일, 자녀를 한없이 비교하는 일, 자녀에게 감당할 수 없는 감정적 스트레스를 부여하는 일 (너 때문에 라든지) 등.


친구 같은 부모라는 단어에 회의적이다. 자녀와 부모는 명백히 권력차가 존재하며,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수용 능력에도 극심한 차이를 보인다. 부모가 쉽사리 이겨낼 수 있는 스트레스가 자녀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줘야 한다는 이야기는 자녀가 감당할 수 있는 광경만 보여줘야 한다는 이야기로 읽자.


부모 자식 관계는 독특하다. 자녀의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부모 자식 관계의 권력관계는 여전하다. 부모 입장에선 부모 되는 일이 처음이고, 자녀 입장에선 세상에서 처음 맺는 인간 관계다. 실제로 부모와의 관계가 평생 인간관계에 영향 미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딸과 엄마가 아닐까 싶다. 동지, 원수, 자매 같은 관계.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지만 엄마가 너무 애처롭고 그러면서 엄마와 닮아가는 자신이 싫을 때. 난 아들놈이지만, 엄마와 외할머니 관계를 보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날이 갈수록 외할머니와 닮아가는 엄마를 보며, 애처로움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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