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의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현모 Jan 12. 2019

불지옥에서, 사선에서.

일은 사람 보고 하는 거다. 여태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업을 보고, 성취를 위해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보고 배울 만한 사람이 있는지 중요하고, 그게 내 사수면 제일 좋다. 부끄럽지 않은 후배가 되고 싶었다. 다행히 내 사수들은 그랬다. 대학원, 인턴, 그리고 지금까지. 뭣도 모르는 내 질문에 선배들은 솔직하게 본인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물으면, 다음부턴 이걸 더하거나 빼라고 말했다. 


라이브는 개차반이었다. 가장 중요한 기술 이슈는 온에어 직전에서야 전달됐다. 일단 내가 참여하는 일은 다 내 거라고 생각하는 나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선배한테 내가 확인하는 과정에서 빼놓은 게 있었는지 물었고, 선배는 난 내 할 바를 다했다고 말씀하셨지만 너무나 답답했다. 스탭 롤에 내 이름이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래. 부끄러웠다. 내가 참여했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의 실수들이 연달아 터졌다. 내 멘탈도 반즘 터질 뻔하다가, 돌아왔다. 내가 만약 제작진이었으면 진짜 죽이고 싶었을 거다. 사실 오늘 속으로 몇 번이나 소리쳤다. 아니 시발 이게 말이 되냐…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선배가 강제로 스케줄을 조정하지 않았다면, 라이브는 분명히 더 개차반으로 실패했을 거다. 


선배는 이런 불지옥 광경을 지금 맛봐야 한다고 했다. 지금 이런 걸 겪어둬야, 나중에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지금 어떤 게 부족했고,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느낀 바를 잊지 말고 잘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더 잘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 지금만큼이나 중요한 건 다음이다. 아직 기회가 많은 시기에, 다음은 더욱 중요하다. 사실 일이라는 건, 지금보다 더 나은 다음을 기약하는 과정이다. 


방송 중간중간에, 선배가 이건 어떠냐, 저건 어떠냐고 계속 물었다. 내 생각에 이건 이렇게 더해야 하고, 저건 저렇게 더해야 할 거 같고 이건 이렇게 빼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선배 생각이 어땠는진 모르겠지만, 생각을 묻는 선배는 좋았다. 


라이브가 끝나고, 제작사와 현장 스태프에게 고생하셨다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더할 일은 많다. 


일은 팀이 한다. 팀이 팀으로서 일하기 위해선 모든 문서를 공유하고, 모든 프로젝트에, 모두가 참여해서, 모두가 하나를 바라보면서 으쌰 으쌰 하는 수밖에 없다. 선배는 내게 크리에이터로서 느낀 쾌감이 어땠냐 물었다. 난 성장하는 재미가 좋았다고 했다. 팀으로서 으쌰 으쌰 도 더 짜릿했다고 말했다. 함께 전진하는 기분이란 중독성이 높다. 일의 일기가 계속 쓰일수록 좋은 선배란, 좋은 팀이란, 좋은 일하는 자세가 무엇인지 고민한다. 사실 뭐가 나은진 모르겠다. 다만, 오늘 느낀 건 내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떳떳하고 열심히 만들어야 후회가 없다. 내가 저 사람의 선배였고, 후배였고, 같이 일했다는 생각이 후회되지 않을 만큼 열심히.

매거진의 이전글 욕심을 갖되, 교만해지지 말아야 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