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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현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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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May 05. 2019

현대인의 죄의식을 담은 영화, '어스'

공포영화는 진화한다.


명백하다. 공포영화는 진화하고 있다. 피칠갑의 슬래셔 무비에서 피 한 방울 없이 ‘갑툭튀' 점프 스케어로 놀라게 하는 컨저링류 호러 영화로, 걷는 좀비에서 뛰는 좀비로 진화하듯 말이다. 단순히 무섭기만 한 영화가 흥행하던 시기도 지났다. 이제 관객은 사회 전체의 부정의를 드러내는 공포영화에 환호한다. 


조동필. 


조던 필이 이 중심에 있다. 코미디언으로 여러 캡처 짤을 남긴 그는 겟 아웃으로 감독의 포문을 열었다. 코미디 대본을 쓰며 사람을 울며 웃기던 사람이라 그런지, 겟 아웃과 어스 내내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더불어 흑인으로서 겪은 인종차별을 소재로 풍자성을 더했다. 웃길 땐 웃기고, 쫄릴 땐 쫄리고, 메시지까지 더했다. 블랙 팬서, 노예 12년 등 흑인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았지만, 이렇게 유쾌하고 무서운 영화는 없었다. 무서운 영화는 많았지만, 이렇게 진중한 영화는 없었다. 조던 필은 흑인 영화에서도, 공포 영화에서도 없던 새로운 특이점인 셈.



조던 필은 겟 아웃에서 인종차별을 녹여냈다. 이번 어스에선 미국 그 자체를 담아냈다.


가장 무서운 공포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근래 들어 본 가장 유쾌하고, 진중하고 재밌는 공포영화다. 무거워지는 순간에 유쾌한 대사가 나온다. 경찰 부를 필요 없다던 주인공의 남편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허세를 부리다가 바로 경찰에게 전화를 건다. 엘리자베스 모스가 경찰을 불러달라고 하자 인공지능 스피커는 ‘Fuck the police’라는 노래를 틀어준다. 얼른 차 타고 도망가야 하는데, 주인공 가족은 누가 몇 명을 죽였는지 ‘킬 수'로 운전대를 정한다. 어처구니없는 인물과 행동의 향연이다.


가볍지만은 않다. 가벼워지는 찰나에 진중해진다. 허세 부리던 남편이 조용해지자 지하인들은 주인공의 집에 침입해 그들을 제압한다. Fuck the police 노래가 나오는 가운데 주인공 가족의 남매는 지하인들과 싸운다. 누가 운전대를 잡을지 정하자마자 지하인의 습격이 이어진다. 태연하게 시리얼을 먹던 주인공 가족은 TV로 지하인들의 습격이 전국적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유쾌함과 어이없음이 가득하던 씬의 공기가 바뀌고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인 오케스트라의 배경음악이 관객의 호흡을 빼앗는다. 


범상치 않은 메시지를 담은 뻔한 그릇


재밌는 영화지만, 내용은 뻔하다. 끝의 반전도 예상 가능하고, 무서운 장면도 어느 순간이 지나면 나오지 않는다. 커뮤니티를 둘러봐도 단순 극적 재미로만 치면, 전작인 겟 아웃보다 못하다는 평이 많다. 플롯을 연결하는 조임쇠는 약하고, 설명은 불친절하다. 한국에 사는 나로선 공감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메시지는 비범하다. 장치도 심상치 않다. 문제의식은 서두에 제시된다.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미국인이야'라고 답하는 레드의 대사에 모든 문제의식과 프레임이 제시된다. 영화의 핵심 주제의식을 대사로 바로 보여주는 조던 필의 이 대담함과 ‘또라이정신'에 감탄한다. 


그렇다. 어스는 미국의 역사와 궤를 함께 한다. 영화 속에서 지하에 사는 지하인들은 지상인들의 그늘이다. 아델레이드가 고기를 먹을 때, 레드는 토끼를 잡아먹는다. 행복하게 인연을 만나 결혼할 때,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과 결혼한다. 이쁜 공주님을 출산할 때, 괴물을 낳는다. 위가 따뜻할 때, 아래는 춥고 그늘지다. 그렇다. 지상인의 행복은 지하인을 제물로 삼는다. 



미국의 역사는 그랬다. 현대 미국인은 미국 원주민을 제물로 삼았다. 아메리칸 프런티어의 역사는 곧 미국 원주민이 죽던 역사다. 한때 북아메리카의 주인이던 미국 원주민들은 자기네 땅을 침범한 미국인들에게 권익을 보호받는 처지다. 


백인은 흑인을 제물로 삼았다. 흑인을 차별하며 그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했고, 분노를 푸는 배출구로 삼았다. 과거 미국의 농장은 흑인 노예로 운영됐으며, 현대 미국 우파의 정치는 소위 ‘유색인종'을 희생시키며 지지층을 결집시킨다. 


미국 자체도 다른 나라를 착취한다. 거대한 마약 소비처인 미국은 주변국인 멕시코를 마약 공급원으로 전락시켰으며 그들이 겪는 혼란에 대해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 한국에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바이스'가 지적하듯 이라크 전쟁은 미국 정부의 억지로 이뤄졌고, 수많은 희생자와 ISIS를 낳았다. 이로 인해 생긴 난민과 엄청난 피해는 미국이 아닌 아랍권 국가가 지고 있다. 


너무나 미국적이지만, 너무나 보편적이다.


미국의 역사로 읽어냈지만, 모든 나라의 역사다. 모든 사회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질서를 만들고 구조를 공고히 한다. 한국의 근현대사도 마찬가지다. 군사정권과 보수정권은 5.18을 매개로 호남 지역을 차별하고 그들의 이념적 카르텔을 굳건하게 만들었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당시 여당이던 자유 한국당은 세월호 희생자를 모욕하며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호남을 차별하며 영남의 의리를 다졌고, 세월호를 모욕하고 음해하며 정부여당이 져야 할 책임을 회피했다. 낙태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돌리듯, 모든 책임을 아래로 돌린다. 


전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동남아에서 자행되는 아동 착취 노동은 주요 스포츠업체가 이윤을 높이기 위해 자행하는 범죄다. 아이폰의 빛나는 성공은 월 23만 원에 불과한 폭스콘 공장 노동이 뒷받침한다. 삼성 반도체의 호실적은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리고 사망한 수많은 피해자를 지운다. 이렇듯 승자와 기득권의 역사는 희생자의 역사기도 하다. 어스는 이 보편적 구조를 미국을 소재로 풀어냈다.


약자의 연대는 가능한가?


영화 속에서 지하인은 1980년대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를 성공시킨다. 미국을 가로질러 손을 잡는 이벤트는 당시 기아 아동을 구휼하기 위한 이벤트였는데, 실패했다고 한다. 지상인이 실패한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를 지하인이 성공시키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약자 사이의 연대를 희망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를 신뢰하게끔 설계됐다. 서로를 믿고 각자의 기능을 수행하면 더 나은 삶을 이룰 수 있기에 우리는 사회를 만들었다. 사회를 계약으로 보든, 무엇으로 보든 개개인 사이의 신뢰는 항상 장려된다. 그렇기에 서로를 믿고, 그 신뢰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사회가 진짜 인간적이고 올바르다. 


지상인은 실패했지만, 지하인은 성공했다. 영화 속에서 지상인은 서로 질투하고 반목한다. 주인공 가정은 친구 가정을 질투하고 욕한다. 친구 가정은 서로를 불신하고 애정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하인은 다르다. 지상인들에게 괴물과 외계인으로 묘사되던 지하인들은 서로를 믿고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를 성공했다. 그렇다면, 더 인간적이고 서로 믿을 줄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더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 지상인이 지하인보다 더 인간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물론 현실에 적용하긴 어렵다. 현실 속 약자는 예민하고 공격적이다. 항상 차별에 시달리고, 권익이 침해받기 때문에 더 날카롭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투쟁이 생활인 사람들에게, 순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기대하는 일은 순진을 넘어서 나쁘다. 피해자스러움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착하고 순한 약자를 찾기 어렵기에 지하인이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에 성공하는 장면은 조던 필의 낙관적인 희망이 아닐까 싶다. 



감독은 묻는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단단한 기반의 출처는 어디냐고 말이다. 미국은 네이티브 아메리칸을, 백인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을, 부자는 빈자를 착취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누군가를 착취한 역사다. 영화 말미에 나오는 반전은 우리 역시 누군가를 착취하고 기득권을 옹호하는 참 나쁜 사람이라며 위선을 지적한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싸운 행동은 결국 기득권을 지키고 진실을 가리려는 은폐였다. 가족을 지키는 선한 의지는 사실 악의였고, 그 악의는 여전히 지하인을 희생시킨다.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디테일, 죄의식


메시지만큼이나 디테일이 좋았다. 영화 속 주인공은 곱슬머리를 파마했는데, 주인공의 지하인은 전혀 파마를 하지 않았다. 샤이닝을 오마주한 듯한 오프닝 및 엔딩과 죠스 티셔츠, 마찬가지로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티셔츠까지 곳곳에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센 척하다가 지하인들에게 맞는 남편은 가장의 허위성을 낱낱이 고발한다. 뒤틀린 위트도 좋았다. 지하인은 대칭으로 디자인된 가위를 휘두르는데, 이는 지상인과 지하인의 명과 암 같은 관계를 대변한다. 


네이티브 아메리칸에 대한 죄의식을 그린 영화 샤이닝은 1980년도에 나왔다. 39년이 지나자 미국은 이제 네이티브 아메리칸, 멕시칸, 아시아인 등 여러 마이너리티에 대한 죄의식을 이야기한다. 죄의식은 여전하고, 평화는 오지 않았다. 주변국으로 불리던 한국은 여전히 주변국과 약자로서 의식이 강하다. 조선족을 혐오하고, 동남아인을 차별하며, 장애인과 빈자를 무시한다. 자신이 저지른 죄보다 당한 피해에 갇혀있다. 어느덧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은 언제쯤 스스로에 대한 죄의식과 수치심을 가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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