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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현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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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May 06. 2019

인피니티 사가를 떠나보내는 어느 씹덕의 슬픔

MCU 까면 사살

인피니티 엔드게임


개봉날부터 오늘까지 엔드게임을 각기 다른 관에서 6번 관람했다. 개봉 첫날엔 스피어X로, 그 이후엔 4D로, 다음엔 롯데시네마 ATMOS로, 그 이후엔 IMAX 3D로 봤다. 조조로 보기도 하고, 새벽에 보기도 했다. 졸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볼 때마다 좋았고, 볼 때마다 감동이었고, 볼 때마다 벅차올랐다.


작년 이 맘 때 내 화두는 ‘대체 타노스를 어떻게 이길까'였다. 태현이형, 윤여훈, 리세윤이랑 같이 밥 먹을 때도 ‘타노스를 어떻게 이길까?’ 물었고, 친구들을 만나도 타노스를 어떻게 이기지? 물었다. 지구적 영웅이 우주적 빌런을 만나 대체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이겨낼지 말이다. 물론 내 모든 예측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인피니티 워의 충격적인 엔딩은 내가 생각한 모든 경우의 수에 없었다. 


이것도 내 경우에 없었다

진짜 광팬이었다. MCU 개봉한 모든 영화를 봤고, 거진 극장에서 봤다. 퍼벤져와 토르마저 극장에서 개봉 당일에 봤다. “야 내가 지금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MCU를 볼 수 있잖아. 이거 못 보고 갔으면 억울해서 어떡해"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근데, 사실 이게 처음은 아니다.


드래곤볼, 스타리그, 무한도전


한 23년 전, 그러니까 아직 둔촌동 현대 3차 아파트 앞에 신성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그곳이 모두 낮은 빌라단지였을 때 우리 집은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때 찍힌 필름 카메라 사진에 난 단 하나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바로 ‘초사이어인' 포즈. 


이 자세다.

손오공이 초사이언이 되려면 주먹을 꽉 쥐고, 팔을 들고 꺾고, 자세를 엉거주춤하게 앉고 괴성을 지른다. 그때 난 드래곤볼에 푹 빠져서, 엄마가 사진 찍자고 하면 저 초사이어인 포즈만 취했다. 어설픈 미소와 함께. 드래곤볼 장난감을 모으고, 드래곤볼 만화책을 샀다. 그때 드래곤볼은 두꺼운 아이큐 점프에 별책부록식으로 연재됐다. 부록을 얻으려고 아이큐 점프를 모은 셈. 심지어 언제는 입체안경이라고 해서, 무언가 그림을 어지럽게 보여주는, 90년대판 3D 안경도 받았다. 


드래곤볼을 덕질하던 미취학 아동은 중학교에 올라가자 스타리그에 빠졌다. 2001년 SKY부터 2007년 DAUM 스타리그까지 공식맵과 선수 전적과 빌드 그리고 경기 순서와 결과를 외우던 미친놈이었다. 하등 쓸모도 없는 숫자인데, 당시 박태민 선수가 갖고 있던 연승 기록과 KT의 세트 연승 기록 등을 줄줄 외웠다. 아직도 기억난다. 과거 토스의 무덤이던 머큐리를 만든 로즈 오브 드림 변종석 제작자…. 그리고 그 머큐리에서 박정석한테 4강전에서 진 우리 콩… 2004년 온게임넷 SKY 프로리그 오프닝을 베낀 KBS.. 해피선데이… 몇 번 말하지만, 나쁜 자의 뻔뻔함보다 우리들의 기억이 더 세다.


그다음은 무한도전이었다.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테다다. 10대를 무한도전과 함께 보낸 이들은 모두가 한 번쯤 “친구들과 저런 추격전 펼치면 재밌겠다"라거나 “우리도 저것보다 재밌지 않을까?”라고 상상했을 테다. 과거 UCC가 열풍이었을 때, 무한도전과 같은 상황극 UCC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자막 스타일도 같았다. 


꽤 오랫동안 함께 했다. 깡 말랐던 유재석이 헬스로 근육맨이 될 때까지, 박명수의 머리가 점점 사라질 때까지, 꼬맹이었던 하하가 어엿한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될 때까지의 시간을 우리는 함께 했다. 같은 시간 우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했다. 



MCU로의 여정


MCU는 그다음 도착지였다. 장담컨대, MCU는 이 시대 최고의 영화이자, 최고의 브랜드다. 과거 크리링의 죽음에 분노하던 손오공과 프리져 앞에 무릎 꿇던 베지터의 좌절에 감정 이입하듯 아이언맨의 트라우마와 캡틴 아메리카의 외로움에 이입했다. 정형돈의 ‘이지 오어'와 유재석의 허리케인 러너에 감탄하듯 캡틴 아메리카의 ‘아 캔 두 디스 올데이'에 감동하고 토르의 ‘브링 미 타노스'에 환호했다. 


누구는 MCU를 ‘뻔한 슈퍼히어로 무비' 라거나 ‘팝콘 무비' 혹은 ‘애들이나 좋아하는 영웅물'이라고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독이고 틀린 해석이다. 솔직히 그렇게 보시는 분들은 대체 최근 영화를 보시나 궁금하다. 웬만하면 지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꼰대다. 장담한다. 


단순한 히어로 영화가 아니었다. 슈퍼히어로지만,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아이언맨은 뉴욕 침공 이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슈퍼히어로로서 동료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두려움 때문에 수많은 아머를 만들고 이는 울트론으로 이어진다. 슈퍼 솔저 캡틴 아메리카는 현대에 적응하지 못해 과거를 그리워한다. 죽은 과거의 연인의 사진을 만지작거리고, 기억을 더듬으며 과거 뉴욕의 그림을 그린다. 항상 합리적이고 냉철했던 암살자 블랙 위도우는 스칼렛 위치가 보여준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헐크와 함께 도망치자고 한다. 무서울 것 없던 토르는 난생처음 타노스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어벤져스 1에서 삭제된 장면.

그냥 팝콘 무비가 아니다. 화려한 효과와 액션 뒤에 진중한 메시지가 있다. 윈터 솔저는 자유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안전이라는 가치로 자유를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지, 자유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희생되는 자유에 대해 논한다. 시빌 워는 피성년후견인 (금치산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인은 얼마나 죗값을 치를 수 있는지, 그저 부품으로 쓰인 사람에게 죄를 얼마나 물을 수 있는지 고민한다. 캡틴 마블은 그동안 억제되어왔던 삶에 대한 여성의 고충과 분노를 녹여냈다. 


윈터솔져에서 퓨리와 대립하는 캡틴


그냥 프랜차이즈라기엔 그 유대감이 다르다. 완성형이 아니라 성장형 프랜차이즈이기 때문이다. 자격이 없어 망치도 들지 못하던 토르는 망치가 없어도 천둥의 힘을 쓰게 됐다. 사익에 미쳐 죽음의 장사꾼이라 불렸던 토니 스타크는 대의를 위한 아이언맨으로 성장했다. 슈퍼 솔저 혈청을 맞은 캡틴 아메리카는 걸어 다니는 프로파간다로 전락했다가 영웅으로 새로이 각성한다. 인생은 한 번에 풀리지 않는다는 심오한 결론. 단편에 불과했던 영화들은 거대한 세계관을 자랑하는 ‘사가'가 됐고 이 시대를 상징하는 영화가 됐다.



이러기에 우리는 캡틴 아메리카의 행복에, 토르의 슬픔에, 아이언맨의 결단에 공감할 수 있었다. 


팬덤 무비라고? 영화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남긴 의미도 다르다. 마블은 ‘뻔한 마블 영화'라는 수식어가 나올 정도로 표준화된 수준의 영화를 제작했다. ‘뻔한 마블 영화'는 곧 ‘믿고 보는 마블'과 동의어다. 그동안 감독과 배우에 달린 수식어였던 ‘믿고 보는'은 이제 제작사에 넘어갔다. 케빈 파이기가 운영하는 마블 제작팀의 지휘 하에 높은 퀄리티 컨트롤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많은 제작사에게 훌륭한 선례를 남겼다. 물론 DC는 이는 개떡같이 해석했고. 



유니버스라는 힌트도 남겼다. 그동안 흥행했던 여러 프랜차이즈는 후속 편을 준비하는 데에 수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공백의 시간에 팬들은 이탈했다. 하지만 ‘유니버스'라는 장치는 물 샐 틈 없이 팬덤을 꽉 잡아놓았다. 또한 개별 영화에 흩어진 팬들이 하나의 영화에 뭉칠 수 있는 장치이기도 했다. ‘유니버스'는 단시간에 소비되고 다시 부활하지 못하던 콘텐츠의 생명력을 늘릴 수 있는 인피니티 건틀렛이었다. 


웹툰, 드라마, 영화 가리지 않고 모든 제작사는 유니버스화에 몰입했고 이는 전체 콘텐츠의 수준을 높인다. 유니버스화엔 필연적으로 거대한 자본이 필요하고, 이는 퀄리티 상승을 수반한다. 물론 타노스만 그 건틀렛을 낄 수 있듯, 이 유니버스도 마블밖에 해내지 못한 게 함정. 별 하나에 다크 유니버스, 별 하나에 DC 유니버스, 별 하나에 몬스터 유니버스 (킹콩에 조의를 표한다)


안녕, 인피니티 사가


엔드게임이 끝나고, 극장에서 나갈 수 없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극장에 불이 다 켜졌을 때도 쉬이 나갈 수 없었다. 솔직히 이 영화가 계속되길 바랐다. 3시간이고, 4시간이고, 5시간이고. 내 10년이 지나가는 기분이라, 내 10대와 20대가 끝나는 느낌이라.


앞으로 엔드게임보다 위대한 영화는 많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내게 인피니티 사가만큼 위대한 프랜차이즈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캐릭터가 각자의 개성으로 살아 숨 쉬고, 서로의 아구를 채우며 돌아가고, 팬들에게 생생한 감동을 주는 프랜차이즈는 앞으로 쉽게 볼 수 없다. 


2018년 초겨울에 무한도전이 종영했다. 약 1년 뒤 2019년 봄에 인피니티 사가가 끝났다. 엔드게임 트레일러에 나오듯, 모든 여정엔 끝이 있다. 인피니티 사가의 여정은 이제 끝났다. 그저 팬으로서 인피니티 사가의 여정에 함께 해서 좋았다. 


시발 끝나지 말아 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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