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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Jun 03. 2016

<원숭이도 화를 낸다>

사육사가 원숭이에게 돌을 준다. 돌을 사육사에게 돌려준 원숭이는 상으로 오이를 받는다. 몇 번 같은 일을 반복한 원숭이가 갑자기 상으로 받은 오이를 밖으로 던진다. 왜일까? 바로 옆에서 자신과 같은 일을 한 원숭이는 오이보다 맛있는 포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일에 차별적 대우를 받으면 원숭이도 화를 낸다. 쟤는 저거 주고, 난 왜 이거 줘? 간단한 이야기다


구의역 사고의 핵심은 불평등이다. 차별적 임금과 인력 구조가 문제다. 여기서 말하는 차별은, 능력에 따른 정당한 성과측정이 아닌, 불합리한 차별을 말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이 가져가고, 회사의 방향과 맞지 않는 사람이 가져가는 일. 은성 PSD는 이 차별과 불평등의 온상이었다.


은성 PSD는 기본적으로 수리업체다. 무언가를 스스로 기획하기보단 하청을 받아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다. 그렇다면 회사의 인력 구성은 현장 수리공이 대부분을 이뤄야하며, 회사의 자본 역시 이들에게 집중적으로 투자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은성 PSD는 서울 메트로 임직원의 '대피처'였다. 퇴직 시기가 되면 은성 PSD의 관리직으로 내려가 메트로에서 받던 임금의 80%가량을 보장받는다. 고용승계, 임금승계, 복지승계 온갖 승계를 받았다. 


여기서 문제가 나온다. 만약 은성 PSD가 메트로만큼 큰 회사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서울메트로는 거대 공기업이며 꽤나 좋은 연봉을 받는다. 은성 PSD가 커봤자 공기업만큼 클 수가 없다. 결국 서울메트로에서 받던 연봉의 80%를 보장해주고, 정년을 지켜주려면 누군가의 임금을 착취하는 수밖에 없다. 고용승계를 받는 메트로 직원들은 대부분 관리직이니, 결국 현장수리공의 임금을 관리직이 착취하는 구조다. 수리업체에서 400만원가량 받는 관리직을 위해 현장수리공이 착취당하는 구조.


결국 현장수리공에게 저임금을 준다. CBS의 보도에 따르면 현장수리공의 평균 월급이 180~220만원선이다. 죽은 김군의 월급은 15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일을 했다. 실습생을 직원처럼 채용해 일을 시키는 건 불법이다. 


자극적이지만, 말하겠다. 결국, 메트로 정규직 직원의 고용승계, 임금승계, 복지승계를 위해 비정규직 청년이 희생된 판국이다. 정규직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나 같은 노동자다. 맞다. 자본가와 달리 생산수단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이 아닌 건 아니다. 결과적으로, 정규직의 고임금과 고용안정성은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것에서 나온다. 내 행운은, 내 행운이 아니라 남의 불행을 빨아먹고 자란다. 내가 누리고 있는 현재는 타인의 미래와 현재를 짓밟고 있다. 현실이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불평등이다. 장하성 교수의 <분노하라>는 소득불평등을 말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 노동시장을 이야기한다. 강남역 사건의 배경엔 결국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이 자리잡고 있다. 여성해방은 가사노동의 사회화와 성별 임금격차 해소에서 시작된다. 구의역 사고도 마찬가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있는 불평등. 


불평등은 기득권이 조장한다. 젠더 권력의 기득권인 남성은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막는다. 남성은 임금, 사회발언권 등 어느 하나 놓치려 하지 않는다. 자본 기득권은 노동자를 착취한다. 노동계의 기득권인 노동귀족은 비정규직을 착취한다. 결과적으로 이 불평등한 노동시장에서 정규직은 고임금, 고용안정성을 가진 노동귀족이다. 연말정산 파동만 봐도 그러하다. 결국, 상위 30%에게 세금을 물리는 일인데, 세상이 망하는 것처럼 말한다. 고임금은 청년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든다. 모든 걸 가진 사람이 있으면, 모든 걸 잃은 사람이 있다. 안타깝게도 미래 세대는 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비정규직 청년, 하청 청년, 주변부 노동을 하는 청년은 조직도 어렵다. 이미 조직이 이루어진 기득권은 강하다. 곳곳에 이미 '기득권'이라는 보이지 않는 테두리로 뭉쳐있으며 현재 사회의 불평등을 조장한다. 기득권에 속한 개개인은 착할지언정 기득권은 착하지 않다. 항상 불평등은 기득권이 조장하기 마련이다. 


내년 대선의 시대정신은 결국 <기득권, 불평등>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말하는 기득권은 모랄 해저드에 찌든 대기업재벌, 비정규직을 희생시키는 노동시장을 외면하는 노동귀족이다. 세상이 불평등하면, 어쨌거나 권력관계의 강자인 기득권에게 죽창을 들어야 한다. 


불평등은 보편성을 갖고 있다. 원숭이도 화를 내는 게 불평등이다. 공포와 두려움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고,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하지만 불평등은 간단하다. 내가 일하는 만큼 받지 못하거나, 불합리한 이유로 차별받을 때 사람은 화가 난다. 불평등은 분노다. 그 분노는 일베처럼 아래를 향해선 안된다. 아래를 향한 분노는 폭력이며, 폭력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불평등에 기반한 분노는 위를 향해야 한다. 기득권을 향한 분노는 혁명이요, 세상을 바꾼다. 사람은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볼 때 새로워진다.


세상은 불평등하다. 원래 그런 게 아니다. 점점 불평등해지고 있다. 1%와 99%이기도 하고, 10%와 90%의 대결이기도 하다. 세상에 완전히 나쁜 사람은 없고, 완전히 착한 사람도 없다. 하지만 불평등한 세상에 기득권은 무조건 나쁘다. 불평등한 세상에 온당한 기득권은 없다. 


다수의 옆에 서야 한다. 불평등이란 보편전선 앞에서, 고통받는 다수 앞에 서야 한다. 그게 시대정신이요, 세상을 바꾸는 길이다.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진 모른다. 고치는 방향은 걸어가면서 바꾸면 된다. 이제 시작이다. 기득권을 향한 분노가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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