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에서 인생을 생각하다
[첫째 날]
올 들어 두 번째 공룡능선 산행. 작년에 이어 세 번째인데 가장 긴장이 된다. 체력이 약한 친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대전에서 아침 7시경 출발을 했다. 이번엔 산중 1박을 하기로 했기에 다행히 시간적 여유가 있다. 여름휴가차 밀려드는 차량들로 소공원 입구는 붐볐다. 주차 후 배낭을 꼼꼼히 챙겨 무장애 탐방로를 서둘러 걷는다. 드디어 비선대! 아~ 비취색 계곡물, 웅장한 바위, 운무 피어오르는 하늘, 이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있지만 마음은 더욱 긴장감으로 채워진다.
마음을 단단히 챙기며 -- 동행하는 친구의 마음을 다잡으며 -- 마등령 돌계단에 발을 내딛는다. 경사도가 35쯤 되는 1.5Km 구간이 문제다. 일기예보는 대체로 맑음이었지만 운무가 내려앉은 산행로는 시야가 넓지 않다. 오히려 다행이다. 멀리 보지 않고 눈앞에 닥친 돌계단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여정도 비슷한 것 같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미래의 걱정을 떨쳐버릴 수 있다.
친구는 예상보다 강했다. 4백여 미터 거리의 금강굴 입구까지 거뜬히 해낸다. 이번 산행에서 금강굴에 들러볼 것을 고민했던 나는, 금강굴로 연결되는 철계단 입구까지 다가가 본다. 가파른 바위를 타고 오르는 철계단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인 건 처음이다. 아름다움을 다음으로 미뤄두는 것도 아름다움이야, 라고 혼잣말하며 나는 등산로로 되돌아 나온다.
마침내 우리는 금강굴 입구를 지나고 또 그만큼의 힘든 구간을 올라 첫 번째 능선 구간에 도착했다. 이쯤에서 운무가 걷혔으면 멋진 화채봉 능선을 조망할 수 있었으련만... 삶의 여정이 그렇듯이 아무리 잘 짜여진 산행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나는 마음을 비웠지만, 친구는 못내 아쉬워한다. 이 힘든 구간을 오르는 동안 나는 집안일로 문자와 전화에 매달려 있었다. 내가 제대로 안내를 못해서 못마땅했는지 친구는 휴식도 거부한 채 나를 앞서서 걸음을 옮긴다.
거친 바위구간을 오르다 쉬다를 반복하며 한 시간여를 무념무상으로 걷는데 친구가 뒤에서 소리친다. "여기 솔나리가 있어!" 솔나리? 이번 산행의 내 키워드 중 하나가 아닌가? 공룡능선 솔나리 산행. 머릿속에 붙여 놓은 소제목이다. 무거운 가방을 추스르며 친구가 가리키는 곳으로 단번에 달려 내려간다.
철이 약간 지나서 꽃술이 시든 모습이었지만 그보다 더 반가울 수가 없다. 피로해진 다리 근육에 힘이 돋는다. 거기서부터 솔나리는 계속 우리를 반긴다. 좌측 경사진 풀섶에서, 질퍽한 경사길 우측 관목 사이에서, 넘어야 할 등로의 바위 한 켠에서. 여기저기서 빼꼼히 얼굴을 내미는 솔나리를 사진에 담으며 걷는 길은 이제 즐겁기만 하다. 친구는 5년 꽃쟁이인 나 보다 솔나리를 더 잘 찾아내며 이제 즐거움에 가득 차 있다. 운무가 가둬둔 풍광과 내 문자질로 표출된 불만은 찾아볼 수가 없다.
솔나리 찾는 즐거움에 빠져서 한참을 걷는 동안 운무가 걷혔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화채능선과 공룡능선의 산봉우리들이 잠깐씩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는 탄성을 질러댔다. 나는 3주 전 산행 때 보았던 만큼의 조망이 터지지 않아 못내 아쉬웠지만 친구는 그 정도의 조망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고 했다. 그래, 이 만큼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준 설악에 감사하자. 충분히 감사할 수 있어.
감사의 마음을 안고 살면 더욱 감사할 일이 생긴다더니... 운무가 저 아래로 내려간 건지 우리가 운무 위로 충분히 올라온 건지 솔나리를 감상하며 걷는 동안 눈앞에 조망에 넓게 터지기 시작했다. 앞서 걷다가 친구를 기다리면서 나는 등로 좌측에 우뚝 서있는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보고픈 마음이 생겼다. 아래에서 볼 때와는 달리 바위 위쪽은 널찍한 쉼터를 제공했고 그곳에서의 풍광은 한 마디로 신세계였다.
이번에는 내가 소리를 질러대며 친구를 신세계로 끌어올렸다. 3주 전 동행했던 친구는 3대가 덕을 쌓아서 멋진 풍광을 볼 수 있었다고 좋아했는데, 나는 4대가 덕을 쌓은 모양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아버지와 고조할아버지, 이렇게가 4대인데... 저 아래쪽에 잔잔한 바다처럼 드리워진 뽀오얀 운무, 그 위로 멋진 바위섬처럼 솟아오른 화채능선과 공룡능선의 숱한 봉우리들, 게다가 구름 한 점 없는 저 맑은 쪽빛 하늘. 정말 장관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건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신선의 세계가 따로 있으랴! 이 순간만큼은 우리가 신선인 게지.
우리는 감탄과 감격에 휩싸여 그 풍광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후에 사진을 이리 찍고 저리 찍고, 이 각도에서 찍고 저 각도에서 찍고, 위에서 찍고 아래에서 올려 찍고, 파노라마로 비디오에 담고, 각자 찍고 둘이 함께 찍고, 그리고는 또 찍고... 그렇게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 뱃속에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소공원 못 미쳐 편의점에서 산 샌드위치와 삼각김밥을 꺼내 들었다. 마등령 돌계단을 오르며 에너지를 많이 쓰기도 했지만 신선의 세계에서 먹는 이 점심 맛을 그 무엇에 비교할 수가 있으랴.
이 풍광을 맞이한 것만으로도 첫날의 여정은 대만족이었다. 우리는 다시 이따금씩 우리를 반기는 솔나리, 그리고 뒤질세라 주황빛 얼굴로 숲을 환히 밝히며 우리에게 다가서는 말나리와 다정한 인사를 나누며 마등령 삼거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여전히 좌측 사면에 펼쳐지는 풍경은 화채봉을 조금씩 밀어내며 대청봉과 중청봉을 끌어당겼다. 보통 운무에 가리워져 잘 보이지 않던 대청봉도 오늘은 안정적이고 미더운 전신의 모습을 멋지게 드러내 주었다. 운무에 가리워져 늘 신비하게 보였던 대청봉이 오늘은 건강하고 섹시해 보였다고나 할까?
마등령 삼거리에서 숙박지인 오세암으로 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다. 거리가 짧은지라 30여분이면 도착할 거라 예상했지만 소요시간이 1시간을 훌쩍 넘었다. 멀리 법당에서 들려오는 예불소리를 들으며 내리꽂다시피 하는 어둑한 돌길을 더듬어 경내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8시가 넘어서였다. 친절한 보살님의 안내로 잠자리를 배정받고 찬물로 샤워를 하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지만 머리는 말똥말똥했다. 오르막 내리막을 거듭하며 지친 몸보다는 그 아름다운 풍경의 감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는 머리가 나를, 내 몸과 마음을 통제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둘째 날]
산사에서의 숙박이 처음이라서인지 잠을 충분히 못 자고 밤새 뒤척이다 네 시경 법당에서 들려오는 예불소리에 눈을 떴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잠을 많이 못 잤으니 더 자야 한다고 머리가 고집을 해서 한참을 더 뒹굴거리다 5시경에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몸과 마음은 상쾌했다. 간단히 양치질과 세면을 한 후 보살님의 안내로 간단히 아침 공양을 했다. 쌀밥, 미역국, 김치. 이 세 가지로 아침식사는 꿀맛이었고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이 단순한 조합으로도 맛있고 만족스러운 식사가 충분히 가능한데, 우리는 늘 더 맛있고 더 영양가 많고 더 신선한 식재료를 찾아 그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소비하고 사는 게 아닌가?
맛난 아침식사와 커피타임 후 어제 늦게 도착해서 못 본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30여 년간 오세암을 찾고 있다는 나이 지긋하신 부부는 오세암이 기도처로 유명하다고 했다. 어젯밤에도 밤 10시에 이르기까지 법당에서 스님의 예불소리가 들렸던 것과 방에 하루 중 예불 시간표가 빼곡히 적혀 있었던 게 이해가 됐다. 우리는 보살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마등령 삼거리로 다시 향했다. 어제저녁 모습 그대로 마등령으로 향하는 등로는 거칠고 가파랐지만, 우리는 공룡능선에 대한 기대감에 힘든 줄 모르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8시 반에 마등령 삼거리 도착! 1시간 반의 산행시간이 30분처럼 느껴졌다는 게 신기했다. 이제부터는 이번 산행의 목표지 공룡능선길. 즐거운 일만 남은 셈이다.
마등령 삼거리에서 시작되는 공룡능선길은 처음부터 녹록치 않다. 한참 동안 지속되는 오르막 숲길. 이번으로 공룡능선을 세 번째 타는 내게는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신경 쓰였다. 관목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등산로 좌측은 까마득한 절벽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산행도 이번 산행도 내가 친구를 리드하는 입장이어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공룡능선은 공식적으로 약 5Km 거리이지만 등산객의 체력에 따라 보통 4시간에서 8시간 가량 걸리는 구간이다. 첫 번째 산행에서는 약 4시간이 걸렸고 두 번째 산행에서는 6시간쯤 걸렸는데, 체력이 가장 약한 친구를 동반하는 이번에는 통과시간이 얼마나 걸릴는지… 앞선 두 번의 산행과 달리 이번엔 산중에서 1박을 했기에 소요시간에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8시간 이내에는 통과하겠지! 오늘은 어떤 야생화들이 나를 반길까? 어떤 풍광이 우리를 놀라게 할까? 친구가 어떤 즐거움을 경험하게 될까? 오직 이런 것들이 내 관심사였다.
마침내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비경이자 등산인들의 순례지라는 공룡능선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공룡의 등뼈 같은 뾰족뾰족한 산봉우리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등산객들은 그 봉우리를 하나하나 통과하느라 끝없어 보이는 바윗길을 오른쪽 옆구리로 걷다가 바위 고갯길을 넘어 왼쪽 옆구리 길로 걷다가 또다시 고갯길을 넘어 우측 옆구리 바윗길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나한봉에서 시작되는 바윗길은 그 독특한 풍광을 더해 가다가 고릴라 바위를 지나 공룡능선의 중심이라 불리는 1275봉에 이른다. 첨탑 모양의 이 봉우리를 기어오르면 설악 전체를 두루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다 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그 봉우리에 오르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하는데… 글쎄 난 기꺼이 사양한다. 어제 마등령을 오르며 보았던 그 풍광이면 족하고도 남는다. 1275봉 고개에 이르는 오르막은 길고도 멋지다. 욕심을 내서 빨리 오르다 보면 다리에 쥐가 나기 십상이다. 힘이 들면 쉬어 가야 한다. 몸이 힘에 부칠 때 걸음을 멈추고 오르막 등산로 디딤돌에 걸터앉아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즐거움, 그 아름다움을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인생도 마찬가지일진대 공룡능선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그 느낌을 헤아릴 수 있을는지…
그다음 나머지 구간의 핵심 포인트는 신선대! 지금껏 걸어온 만큼의 거리를 소화해야만 다다르게 된다. 숲길을 걷다가 바윗길을 걷다가 이름은 모르지만 1275봉 못지않게 길고도 긴 봉우리 고갯길을 넘어서 한없이 걷다 보면 도착하는 곳이 신선대다. 이곳에 도착하려면 몸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힘들기도 하지만, 온갖 야생화들이 어우러져 각기 자태를 뽐내는 천상의 화원을 두 군데나 거쳐가는 즐거움이 나에겐 있다. 이번 천상의 화원에는 설악산에만 자생하는 바람꽃과 솔나리와 산오이풀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드디어 힘들게 도착한 신선대! 친구는 지칠 대로 지쳐서인지 투덜, 투덜, 투덜거림을 반복하며 신선대에 올랐다. 지나온 공룡능선 풍광을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곳이 신선대라고 하는데 오늘 그쪽 풍광은 꽝이었다. 운무에 가려서 봉우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희운각 대피소에서 시작되는 소청봉, 중청봉, 대청봉 쪽의 날씨는 최고여서 세 봉우리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친구는 대청봉의 풍광에 환호하며 그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또 찍고 하며 즐거워했다. 산행을 모두 마친 후 저녁식사를 하며, 공룡능선 구간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어디였느냐고 물으니 친구는 신선대라고 답했다. 그토록 투덜대며 오른 곳이 가장 인상적이라니… 많이 힘들었지만 그 결과가 아름다웠던 곳, 그런 곳이 오래 기억에 남는 모양이다. 인생을 또 들먹이자면,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 중에 그런 지점이 어디였던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나에게 공룡능선의 또 다른 묘미는 야생화다. 공룡능선은 희귀야생화의 천국이다. 이곳에서만 서식하거나 이곳에서 보기가 쉬운 야생화들이 아주 많다. 금강봄맞이, 연잎꿩의다리, 산솜다리, 등대시호, 금강초롱, 솔체꽃(구름체꽃), 금마타리, 솔나리, 바람꽃, 말나리... 공룡능선 산행이 허용되는 5월 중순부터 시작해 가을 깊숙이까지 공룡능선은 철 따라 어울리는 희귀야생화들을 선보인다. 야생화의 매력에 푹 빠진 꽃쟁이들은 시시 때때 희귀야생화로 옷을 갈아입는 공룡의 매력에 이끌려 봄, 여름, 가을, 시간 날 때마다 공룡을 찾는다. 그들은 야생화의 매력에 이끌려 3시간 이상 걸리는 가파른 마등령 돌길을 오르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는 공룡능선을 통과하며 그들은 풀섶에서, 바위틈에서, 바위 꼭대기에서, 등산로 돌판에서 어여쁜 야생화들을 영접하며 감탄을 자아낸다. 그들을 더 생생히 마음에 간직하기 위해 꽃쟁이들은 등산스틱을 집어던지며 카메라를 잡는다. 멋진 야생화 모델 앞에 철퍼덕 엎어지기도 하고, 옆구리를 깔고 누워 하늘로 카메라를 향하기도 하고, 암벽 위로 기어올라 바위에 배를 바짝 붙여 몸을 의지하기도 하며, 아름다운 그녀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아~ 이 순간만큼 걱정이 없고 이 순간만큼 황홀하고 이 순간만큼 행복할 수 있을까?
이번 산행에서 나는 솔나리에 초점을 맞췄다. 마등령 중간쯤부터 시작된 솔나리의 행렬은 공룡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공룡능선의 솔나리는 더 신선하고 더 기품 있고 더 우아했다. 저 높은 바위 위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서 대청봉을 향해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그 솔나리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게다. 신선대에 다다랐을 때 솔나리들은 한두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 얼굴을 내밀었다. 인간의 성장단계로 친다면, 어린이, 청소년, 장년, 노년 모습의 온갖 솔나리들이 얼굴을 내밀며 우리를 반겼다. 모두 당당하고 우아하게 환영의 미소를 지으며 저 깊숙한 숲 속에서 등산로로 우리를 반기러 나온 것 같았다. 특히, 3주 전 공룡을 찾았을 때 유아의 모습이었던 신선대 정상의 솔나리 두 개체는 절정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3주 만에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그녀들을 제대로 사진에 담기 위해 나는 그들 앞에 엎드려 가까이 다가가 보고, 옆구리로 누워서 그들의 어여쁜 뺨을 클로즈업해 보기도 하고, 저 멀리 소청봉 오르막 능선에 그들의 우아한 자태를 대비시켜 보기도 하며, 온갖 앵글로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해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을 걸 알기에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내년에 또 봐!
신선대에서 공룡능선이 끝나는 무너미고개까지의 여정은 거리도 짧고 길도 수월했다. 다만, 공룡능선을 통과하면서 거쳐야 하는 십여 개의 유격 코스 중 가장 길고 긴장감 넘치는 코스가 들어있는 구간이다. 여기서 유격 코스란, 훈련병들의 지구력과 담대함을 키우기 위해 설치한 군사 장애물과 유사한 산행 코스를 뜻한다. 공룡능선의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바위 고갯길에는 긴 쇠파이프나 쇠말뚝 손잡이나 발판 또는 긴 로프 등이 설치되어 있어서 네 발, 즉 손과 발 모두를 이용해서 통과해야 하는 구간이 여러 군데 있다. 순간적인 체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신선대에서 무너미고개 사이의 긴 유격 코스는 그 경사도가 60여 도에 달하는 내리막 바위길인데 양 옆에 약 30미터 길이의 쇠파이프가 설치돼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려다보면 아찔한 느낌부터 몰려와서 과연 자신이 저곳을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는 곳이다.
세 번째 공룡을 타는 나는 차분하게, 아주 차분하게 등산스틱을 접어서 가방에 고정시킨 후 친구도 그렇게 하도록 도왔다. 이제 앞을 향하며 나아가든 뒷걸음으로 내려가든 두 손과 두 발을 사용해 조금씩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으면 된다. 나는 숙달된 조교처럼 시범을 보이며 친구를 리드했다. 우리는 천천히 차분하게 마지막 유격 코스를 무난히 통과했다. 친구는 발걸음이 한번 미끄러져서 상당히 당황해했지만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삶의 여정에서 간혹 우리는 앞에 드리워진 어려움에 당혹해하며 어찌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고 현명하게 주어진 장애물을 통과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산행에서든 삶의 여정에서든 어려웠던 시간을 되돌아보면 그저 별거 아니었거나 나를 더 성숙하게 하는 경험으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무너미고개 삼거리에 도착해 인증사진을 남긴 후 편안한 마음으로 천불동 계곡 내리막길로 진입했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8Km가 넘지만 크게 힘든 구간은 아니다. 다만, 거리가 만만치 않고 기대했던 즐거움은 거의 다 누렸기에 지겹고 무료한 산행길만 남아 있다고 보면 된다. 인내력이 절실한 구간이다. 약 20여 Km에 해당하는 공룡능선 전 산행 구간 중 가장 많은 참을성이 요구되는 구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다져진 돌길을 따라 우리는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사실상 체력이 고갈되어 이야기를 나눌 힘도 없어 보였다. 1Km 정도를 걸으니 우측 계곡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 위 대청봉에서부터 땅속으로 스며들어 흐르던 물줄기가 땅 위로 솟아나 흐르는 지점이었으리라. 앞서 걷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개울 쪽으로 다가가 등산화 끈을 풀어가며 친구를 불러들였다. 한여름의 계곡물이 이렇게 차가울 수 있을까? 10초 이상 발을 담글 수 없을 만큼 물은 차가웠다. 설악의 신비함과 위용과 아름다움이 계곡물속에 스며든 느낌이었다.
차가워, 차가워를 연발하며 우리는 묵묵히 고생해준 발바닥을 달래고 얼굴에서 땀을 닦아내고 물소리로 가슴을 식히며 20여 분간 달콤한 휴식시간을 보냈다. 더 머물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공룡능선에서 그 비경과 야생화에 취해 너무 많은 시간을 사용했기에 저녁시간에 맞춰 산행을 마치려면 서둘러야 했다. 천불동 계곡은 여러 개의 시원한 폭포와 천 개의 절경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우리는 최소한의 시간을 할애하면서 걷고 또 걸었다. 챙겨간 식수가 떨어져 양폭대피소에 잠깐 들른 걸 제외하고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체력이 나 보다 약한 친구는 툴툴거리다 못해 이제 내가 말을 걸어도 아예 대꾸를 하지 않고 말없이 걷기만 했다. 마침내 우리는 마등령길과 만나는 비선대에 도착했다! 이제 부드럽고 편안한 구간만 남아있다. 하지만 체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해가 기울어 어둑해진 나머지 3Km를 걷는 데에도 많은 인내심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걷고 또 걸어서 우리가 소공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8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주차장에서 차를 회수해 서둘러 달려서 야경이 아름다운 설악항의 한 식당에 자리를 잡았을 때에야 친구의 얼굴이 환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친구는 그제야 우리가 공룡능선 산행을 성공적으로 잘 마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갑자기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했다. 다섯 손가락과 손바닥의 감격스러운 만남! 그리고 이어진 몇 잔의 소맥이 가져다준 시원함과 짜릿함! 세 번의 공룡능선 산행 중에 그 기쁨은 최고였지만 한여름 산행은 내게도 참 힘든 여정이었다. 천불동 계곡을 걸어 내려오면서 이제 공룡능선은 이번으로 졸업이다, 공룡을 세 번이나 탔으니 이것으로 충분해, 라고 되뇌었는데 벌써 그 능선이 그리워진다. 이걸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