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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 Cha Sep 28. 2022

공룡능선, 그 매력에 빠지다

[첫째 날]


7월 26일, 한여름의 열기가 하늘을 찌른다. 체력이 약한 친구를 동반해 공룡능선 산행에 나서는 날이다. 아침 일찍 출발했으나 설악산 소공원 입구는 여름휴가차 밀려드는 차량들로 붐볐다. 배낭을 꼼꼼히 챙겨 무장애 탐방로를 서둘러 걸어서 비선대에 도착한다.


동행하는 친구의 마음을 다잡으며 마등령 돌계단에 발을 내딛는다. 경사도가 35쯤 되는 1.5Km 구간이 문제다. 일기예보는 대체로 맑음이었지만 운무가 내려앉은 산행로는 시야가 넓지 않다. 친구는 예상보다 강했다. 우리는 금강굴 입구를 지나고 또 그만큼의 힘든 구간을 올라 첫 번째 능선 구간에 도착했다. 이쯤에서 운무가 걷혔으면 멋진 화채봉 능선을 조망할 수 있었으련만... 삶의 여정이 그렇듯이 아무리 잘 짜여진 산행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나는 마음을 비운다.


거친 바위구간을 오르다 쉬다를 반복하며 한 시간여를 무념무상으로 걷는데 친구가 소리친다. "여기 솔나리가 있어!" 솔나리? 이번 산행의 내 키워드 중 하나가 아닌가? 공룡능선 솔나리 산행. 머릿속에 붙여 놓은 소제목이다. 철이 약간 지나서 꽃술이 시든 모습이었지만 그보다 더 반가울 수가 없다. 피로해진 다리 근육에 힘이 돋는다. 여기저기서 빼꼼히 얼굴을 내미는 솔나리를 사진에 담으며 걷는 길은 이제 즐겁기만 하다. 


솔나리 찾는 즐거움에 빠져 걷는 동안 운무가 걷혔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화채능선과 공룡능선의 산봉우리들이 잠깐씩 그 경쾌한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는 탄성을 질러댔다. 

감사의 마음을 안고 살면 더욱 감사할 일이 생긴다더니... 운무가 저 아래로 내려간 건지 우리가 운무 위로 올라온 건지 솔나리를 감상하며 걷는 동안 눈앞에 조망이 넓게 터지기 시작했다. 


앞서 걷던 나는 등로 좌편에 우뚝 솟은 바위 위로 올라보고픈 마음이 생겼다. 바위 위쪽은 널찍한 쉼터를 제공했고 그곳에서의 풍광은 한 마디로 신세계였다. 이번엔 내가 탄성을 지르며 친구를 신세계로 끌어올렸다. 잔잔한 바다처럼 아래쪽에 드리워진 뽀오얀 운무, 그 위로 멋진 바위섬처럼 솟아오른 화채능선과 공룡능선의 숱한 봉우리들, 게다가 구름 한 점 없는 저 맑은 쪽빛 하늘. 정말 장관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건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신선의 세계가 따로 있으랴! 이 순간만큼은 우리가 신선인 게지.


우리는 감탄과 감격에 휩싸여 그 풍광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 뱃속에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소공원 못 미쳐 편의점에서 산 샌드위치와 삼각김밥을 꺼내 들었다. 마등령 돌계단을 오르며 에너지를 많이 쓰기도 했지만 신선의 세계에서 먹는 이 점심 맛을 그 무엇에 비교할 수가 있으랴.


신선의 세계에서 내려온 우리는 마등령 삼거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여전히 좌측 사면에 펼쳐지는 풍경은 화채봉을 조금씩 밀어내며 대청봉과 중청봉을 끌어당겼다. 보통 운무에 가리워져 잘 보이지 않던 대청봉도 오늘은 안정적이고 미더운 전신의 모습을 멋지게 드러내 주었다. 운무에 가리워져 늘 신비하게 보였던 대청봉이 오늘은 건강하고 섹시해 보였다고나 할까?


마침내 마등령 삼거리에 도착해서 숙박지인 오세암으로 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다. 멀리 법당에서 들려오는 예불소리를 들으며 내리꽂다시피 하는 어둑한 돌길을 더듬어 경내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8시가 넘어서였다. 잠자리를 배정받고는 일찌감치 잠을 청했지만 머리는 말똥말똥했다. 오르막 내리막을 거듭하며 지친 몸보다는 그 아름다운 풍경의 감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는 머리가 나를, 내 몸과 마음을 통제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둘째 날]


산사에서의 숙박이 처음이라서인지 밤새 뒤척이다가 네 시경 법당의 예불소리에 눈을 떴지만 몸과 마음은 상쾌했다. 쌀밥, 미역국, 김치로 차려진 아침식사는 그저 꿀맛이었다. 이 단순한 조합으로 맛있고 만족스러운 식사가 충분히 가능한데, 우리는 늘 더 맛있는 것을 찾아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소비하며 사는 게 아닌가?


경내를 간단히 둘러본 후 우리는 마등령 삼거리로 다시 향했다. 등로는 거칠고 가팔랐어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8시 반에 마등령 삼거리에 도착한 후 이번 산행의 핵심인 공룡능선길로 발을 내딛었다. 이제 즐거운 일만 남은 셈이다. 하지만 공룡능선길은 처음부터 녹녹치 않다. 오르막 숲길의 좌측면은 까마득한 절벽이기 때문이다. 공룡능선길은 약 5Km 거리이지만 등산객의 체력에 따라 4시간에서 8시간가량 걸리는 구간이다. 


드디어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비경이자 등산인들의 로망인 공룡능선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공룡의 등뼈 같이 생긴 뾰족뾰족한 산봉우리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등산객들은 그 봉우리를 하나하나 통과하느라 끊임없는 바윗길을 오른쪽 옆구리로 걷다가 왼쪽 옆구리로 걷다가 또다시 오른쪽 옆구리 바윗길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나한봉에서 시작되는 바윗길은 그 독특한 풍광을 더해 가다가 고릴라 바위를 지나 공룡능선의 중심이라 불리는 1275봉에 이른다. 1275봉 고개 오르막은 길고도 멋지다. 욕심을 내서 빨리 오르다 보면 다리에 쥐가 나기 십상이다. 힘이 들면 쉬어 가야 한다. 몸이 힘에 부칠 때 걸음을 멈추고 오르막 등산로 디딤돌에 걸터앉아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즐거움, 그 아름다움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공룡능선 구간 중 또 다른 핵심 포인트는 신선대다. 지금껏 걸어온 만큼의 거리를 소화해야만 다다르는 곳이다. 숲길과 바윗길로 길고도 긴 봉우리 고갯길을 한없이 걸어야 도착하는 곳이다. 이 구간은, 몸이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몹시 힘들기도 하지만, 온갖 야생화들이 자태를 뽐내는 천상의 화원을 거쳐가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번에는 설악산에만 자생하는 바람꽃과 솔나리와 산오이풀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드디어 힘들게 도착한 신선대! 지나온 공룡능선 풍광을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곳이라고 하는데 오늘 그쪽 풍광은 꽝이다. 운무에 가려서 봉우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반대편의 소청봉, 중청봉, 대청봉 쪽의 날씨는 최고여서 세 봉우리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대청봉의 풍광에 환호하며 즐거워했다. 많이 힘들었지만 그 결과가 아름다웠던 곳, 그런 곳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 여정 중에는 그런 지점이 어디였던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나에게 공룡능선의 또 다른 묘미는 야생화다. 공룡능선은 희귀야생화의 천국이다. 이곳에서만 서식하거나 이곳에서 보기가 쉬운 야생화들이 참 많다. 금강봄맞이, 연잎꿩의다리, 산솜다리, 등대시호, 금강초롱, 구름체꽃, 금마타리, 솔나리, 바람꽃, 말나리... 봄부터 가을까지 공룡능선은 철마다 어울리는 희귀야생화들을 선보인다. 야생화의 매력에 푹 빠진 꽃쟁이들은 시시때때로 공룡을 찾는다.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는 공룡능선을 통과하며 그들은 풀섶에서, 바위틈에서, 바위 꼭대기에서, 등산로 돌판에서 매력이 넘치는 야생화들을 영접하며 감탄을 자아낸다. 멋진 야생화 모델 앞에 철퍼덕 엎어지기도 하고, 옆구리로 누워 카메라를 하늘로 향하기도 하고, 암벽 위로 기어올라 바위에 배를 바짝 붙이기도 하며 아름다운 그녀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아~ 이 순간만큼 걱정이 없고 황홀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이번 산행에서 나는 솔나리에 초점을 맞췄다. 마등령 중간쯤에서 시작된 솔나리의 행렬은 공룡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공룡능선의 솔나리는 더 신선하고 더 기품 있고 더 우아했다. 저 높은 바위 위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서 대청봉을 향해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그 솔나리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게다. 신선대 주변의 솔나리들은 한두 걸음 옮길 때마다 새 얼굴을 내밀었다. 인간의 성장단계로 친다면, 어린이, 청소년, 장년, 노년 모습의 온갖 솔나리들이 우리를 반겼다.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저 깊숙한 숲속에서 우리를 반기러 나온 것 같았다. 


신선대에서 공룡능선이 끝나는 무너미고개까지의 여정은 거리도 짧고 길도 수월했다. 다만, 공룡능선을 통과하면서 거쳐야 하는 십여 개의 유격 코스 중 가장 길고 긴장감 넘치는 코스가 들어있는 구간이다. 공룡능선의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바위 고갯길에는 긴 쇠파이프나 쇠말뚝 손잡이나 쇠발판 또는 긴 로프 등이 설치되어 있어서 손과 발 모두를 이용해서 통과해야 하는 구간이 여러 군데 있다. 신선대에서 무너미고개 사이의 긴 유격 코스는 그 경사도가 60여 도에 달하는 내리막 바위길인데 양 옆에 약 30미터 길이의 쇠파이프가 설치돼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려다보면 아찔한 느낌부터 몰려와서 과연 내가 저곳을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는 곳이다.


안전하게 이 구간을 통과하기 위해 먼저 등산스틱을 접어서 가방에 고정시켰다. 이제 앞을 향하며 나아가든 뒷걸음으로 내려가든 두 손과 두 발을 사용해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으면 된다. 삶의 여정에서 간혹 우리는 앞에 드리워진 어려움에 당혹해하며 어찌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고 현명하게 주어진 장애물을 통과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산행에서든 삶의 여정에서든 어려웠던 시간을 되돌아보면 그저 별거 아니었거나 나를 더 성숙케 하는 좋은 경험으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너미고개에 도착한 우리는 천불동 계곡 내리막길로 진입했다. 남은 거리는 8Km가 넘지만 크게 힘든 구간은 아니다. 다만, 거리가 만만치 않고 기대했던 즐거움은 거의 다 누렸기에 지겹고 무료한 산행길만 남아 있는 셈이다. 20여 Km에 달하는 공룡능선 산행 중 참을성이 가장 많이 요구되는 구간이라고나 할까? 걷고 또 걸어서 소공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8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차를 회수해 야경이 아름다운 설악항의 식당에 자리를 잡고서야 우리가 공룡능선 산행을 무사히 잘 마쳤다는 걸 깨달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다섯 손가락과 손바닥의 감격스러운 만남! 참 힘든 산행이었지만 벌써 그 능선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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