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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 Cha Oct 22. 2024

백두산, 그 생태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9)

— 백두산 서파 야생화


오늘은 탐사 넷째 날, 백두산 서파에 오르는 날이다. 두 번째 날에 이미 천지를 맘껏 즐겼지만 서파에서 보는 천지의 모습은 어떨까 기대가 크다. 사실, 서파의 야생화는 북파와 어떻게 다를까가 더 큰 관심사다. 셔틀버스를 타고 백두산 서파로 오르는 길은 북파 쪽 보다 완만했고, 도로변에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도열해서 우리를 반겼다. 그중 가장 눈에 들어온 건 자주꽃방망이였다. 한국에서는 희귀종으로 여겨지는 꽃이 이곳에는 마치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승용차였다면 당장 차를 멈추고 그들에게 달려갔을 텐데,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하는 백두산 오름길에서는 그게 가능하지 않다.


서파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점심식사부터 해결했다. 휴게소 식당에서 비빔밥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먹는 한국식 비빔밥은 더 맛났다. 백두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늘 셔틀버스를 타기 위한 기다림의 연속이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점심을 기다림 없이 해결하다니... 안내팀의 철저한 준비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긴 계단을 따라 서파에 오르는 사람들

주차장에서 서파에 오르기 위해서는 긴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의 수가 무려 1,440개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 계단길이 너무 힘들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 야생화 탐사를 다니며 산행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편안한 길이었다. 더군다나 계단 양쪽에 피어난 각양각색의 야생화를 감상하며 사진에 담는 건 그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계단초입부터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온통 노랑의 벌판이었다. 한 가지 꽃이 아니었다. 작고 앙증맞은 노랑꽃들의 군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산미나리아재비라고 했다. 초록에 노랑꽃이 빽빽이 들어찬 모습이 밤하늘에 촘촘히 들어찬 별들 같았다. 강원도 고산에서 왜미나리아재비와 미나리아재비는 무수히 많이 보아왔지만 산미나리아재비는 처음이다. 두 번째로는 조밥나물을 닮았지만 꽃이 크고 색이 더욱 뚜렷한 껄껄이풀이라는 야생화 군락이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고려조밥나물이라는 이명도 지니고 있었다. 계단길에서 멀리 떨어진 경사면에는 크고 튼튼해 보이는 노랑꽃들이 엄청난 군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화살곰취라고 했다. 가까이에도 몇 개체가 보여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잎이 화살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꽃들이 왜 이리도 많은 지 감탄의 연속이었다. 사실, 그 감탄과 감흥을 즐기러 백두산 야생화 탐사에 나선 게 아닌가?

(좌상) 산미나리아재비 (우상) 껄껄이풀 (하) 화살곰취

국화 모양의 꽃들도 계단 주변 곳곳에서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다가가 보니 천문봉 새벽탐사에서 이미 보았던 꽃들이었다. 잎이 가늘고 깊게 갈라지는 바위구절초는 이곳에서의 꽃색이 더 홍조를 띠었다. 다른 하나는 구름국화였다. 꽃이 옅은 자색이고 꽃대가 땅에서 하나씩 따로따로 올라왔다. 잎도 땅에서 하나하나 따로 올라왔고, 꽃과 잎의 모양으로 봐서는 국화라기보다 오히려 개미취와 유사해 보였다.

(좌) 바위구절초 (우) 구름국화

1440 계단의 여정은 전혀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온갖 꽃들의 향연이 계단 양옆으로 때로는 계단 사이사이에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문봉에서 보았던 바위돌꽃, 좁은잎돌꽃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종의 다육식물로 보이는데 암수구별이 있는 자웅이체 식물이었다. 붉은 꽃은 암꽃, 노란 꽃은 수꽃이라고 했다. 산형과 식물인 부전바디도 수없이 만났다. 바디나물과 유사한 종인데 부전고원에서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이란다. 개화정도에 따라서 꽃색이 옅은 녹색, 옅은 자주색, 진한 자주색으로 변하는 모습을 한 개체에서 볼 수 있었다.

(좌) 부전바디 (우) 감둥사초

사초 종류인데 줄기에 비해 열매가 무척 커서 검고 두툼한 이삭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 식물이 많이 눈에 띄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감둥사초라 했다. 검둥을 부드러이 표현한 느낌이 들었다. 검둥, 감둥, 감동, 이 세 단어가 왠지 내게는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잎도 줄기도 꽃차례도 무척이나 튼튼해 보이는 큰오이풀이란 식물도 처음 만났다. 황송포 습지에서 만난 가는오이풀과는 전초의 모양이 아주 대조적이었다. 한국의 고산에서 많이 보이는 산오이풀이 화려함을 선사한다면 큰오이풀은 건강함의 표본 같아 보였다. 멀리 경사면에는 흰색 꽃을 달고 우뚝우뚝 서있는 박새 군락이 많이 보였다. 박새는 언제 어디서 봐도 크고 튼튼하고 수수하다. 저렇게 크고 높게 자라난 식물체가 가을과 겨울을 지나면서 자신을 철저히 녹여버려서 초봄엔 그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박새의 이런 삶의 사이클에 늘 감동을 받는다. 제 때가 되면 그들은 또 싹을 틔워 일어나 거대한 군락을 이룰 것이다.


계단길 좌우에서 그 무엇 보다 우리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비로용담이었다. 소천지 근처에서 처음 마주했던 그 감동은 다시 보아도 여전했다. 꽃잎도 꽃술도 오로지 코발트블루, 그 강렬한 색감은 아무리 반복해서 보아도 우리의 뇌파를 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자신감 뿜뿜이다. 꽃색은 비슷하지만 보다 부드러운 파란색을 지닌 하늘매발톱도 여기저기서 자신을 뽐낸다. 이곳의 하늘매발톱은 꽃술 주변에 노란 테두리를 더하여 보다 세련된 느낌을 준다.

(좌) 비로용담 (우) 하늘매발톱

두메분취와 산각시취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다. 완전히 개화하기 전 단계에서 꽃봉오리만으로 둘을 구분하는 건 쉽지 않았다. 작은 바윗돌 아래에는 톱바위취가 만개해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설악의 참바위취와 아주 흡사한데 자세히 보면 잎의 가장자리가 톱날 모양이라서 구분이 된다. 천문봉에서 많이 보았던 씨범꼬리와 나도개미자리도 멋진 모습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나도개미자리는 바위구절초랑 구름범의귀에게 자신의 한 켠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 착한 마음으로 함께 어울리는 모습 때문에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좌) 톱바위취 (우) 바위구절초를 감싸 안고 있는 나도개미자리

처음 마주하는 꽃들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아주 익숙한 꽃이 눈앞에 나타났다. 가을이 되면 야생화 애호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는 물매화다! 한국에서는 9월이나 되어야 모습을 드러내는 물매화가 백두산 고지에서는 7월에 개화를 하다니… 그 청초한 아름다움은 어디에서든 다를 바가 없다. 물매화에서 벗어나 고개를 드니 계단 옆 언덕에 익숙한 분홍 꽃들이 즐비하게 피어 있다. 좀참꽃이다. 천문봉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언덕 위로 계속 잡아끌었던 바로 그 진달래과 식물이다. 꽃색이 옅지도 진하지도 않아서 분홍색의 표본처럼 느껴지는 이 꽃은 이곳에서 처음 만난 것처럼 여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분홍색에 정신이 팔려 좀참꽃 뒤에서 멋진 배경을 선사하고 있는 담자리꽃나무를 놓칠 뻔했다. 꽃은 이미 절정기를 지나 제 모양을 잃었지만 서로 감싸 안고 씨방을 보호하고 있는 꽃잎의 모습은 장엄하게 아름다웠다.

(좌) 좀참꽃과 담자리꽃나무 (우) 구름범의귀와 구름송이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지 1시간 여가 지났을까? 야생화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이 우리는 벌써 새로운 천지를 마주하고 있었다. 서파에서 보는 천지의 모습은 북파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북파의 천지가 가파르게 솟은 봉우리들 사이에서 짙푸르고 장엄해 보였다면, 다소 완만한 경사면과 함께 하는 서파의 천지는 더 넓어 보이고 물색도 파스텔톤으로 부드러웠다. 게다가, 오늘의 천지 가장자리 봉우리들에는 가벼운 운무가 드리웠다 걷혔다를 반복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 멀리 반대편의 북한 땅 장군봉이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니 애절한 마음이 더했다.


30여분 가량 천지를 감상하며 사진에 담고는 하산을 시작했다. 계단을 중심으로 올라갈 때 반대편 쪽의 야생화들을 살폈다. 노란색 두메양귀비가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고 구름송이풀도 가끔 눈에 띄었다. 나도수영을 처음 만났는데, 까치수염과는 상당히 다른 식물이었다. 까치수염과 달리 꽃차례가 곧추서 있고 잎은 둥글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까치수염은 앵초과인데, 나도수영은 마디풀과에 속해 있었다. 북파의 야생화들이 강렬했다면 서파의 야생화들은 다정했다. 셔틀버스에 올라 다음 탐사지인 왕지로 향하는 도로변에는 자주꽃방망이와 좁은잎어수리와 껄껄이풀이 길게 도열해 바람에 몸을 흔들어대며 우리를 환송했다.

도로변의 야생화들: 자주꽃방망이, 좁은잎어수리, 껄껄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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