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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 Cha Oct 24. 2024

백두산, 그 생태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10)

— 왕지 야생화 탐사

마음은 백두산 서파 야생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리는 고산화원 왕지로 향했다. 해발이 무려 1,850미터나 되는 곳에 청태조 누루하치의 전설을 담은 연못이 자리 잡고 있어서 왕지(王池, King’s Pond)로 불린다고 한다. 그 연못에 이르는 약 1km 거리의 데크길 양쪽 초원에 각양각색의 야생화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다.


공원에 들어서기도 전 도로변 숲 가장자리에서 큼지막한 밝은 주황색 꽃이 나를 끌어당겼다. 한국에도 자생한다지만 나는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날개하늘나리였다. 내가 감탄을 연발하며 사진에 담는 모습을 보고 일행들이 달려들었다. 정말 신기했다. 굵직한 줄기에는 분명 날개모양의 세로줄이 길게 패여 있었다. 더 머물고 싶었던 서파를 일찍 떠나온 아쉬움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 준 고마운 꽃이기도 했다.

(좌) 날개하늘나리 (우) 이삭단엽란

공원입구에서부터 귀하지만 익숙한 꽃들이 우리를 반겼다. 자주꽃방망이가 계속 눈에 들어왔고, 함백산에서 보았던 멍덕딸기, (명천송이풀로도 불리는) 뭔가 흐트러진 모습의 송이풀, 딱 한송이 눈에 띈 참대극 등이 그것이었다. 사진 찍느라 뒤쳐진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야생화 탐사 안내자는 그늘진 바위 쪽을 가리키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이끼와 나무뿌리로 덮인 바위 옆에 난초 군락이 눈에 띄었다. 이삭단엽란이라고 했다. 나는 펜스를 가볍게 넘어 단숨에 그쪽으로 뛰어들었다. 줄기 아래쪽에 넓은 타원형 잎을 딱 한 장씩만 달고 있는 난초 여섯 개체가 다정하면서도 씩씩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나는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워서 최대한 멋지게 (그리고 기다리는 일행을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사진에 담고 데크로 물러섰다.


나무 그늘을 벗어나 데크길을 몇 발자국 걸어 나가니 시야가 확 트인 초원이 나타났고 온갖 흰 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설악의 마등령 삼거리에서 군락으로 보았던 꿩의다리를 비롯해, 강원도 고산에서 많이 자생하는 산형과 식물들이었다. 개구릿대와 좁은잎어수리라는 이름의 흰색 천으로 초원이 온통 뒤덮인 듯했다. 왜우산풀도 간혹 눈에 띄었다. 늦여름 소백산 능선을 걸으며 만끽했던 냉초 군락도 나타났고 소천지 숲길에서 이미 만난 민박쥐나물도 참 많이 보였다.

산형과 식물들로 뒤덮힌 왕지 초원의 모습

이삭단엽란을 본 이후로 약간은 무료해지려는 참에 산뜻하고 매력적인 새 야생화가 나타나서 나를 다시 흥분시켰다. 손바닥난초라고 했다. 낱꽃과 꽃차례의 모양은 흰제비란과 아주 닮았는데 꽃색이 산뜻한 분홍이었다. 이름이 왜 손바닥난초인가 궁금해하던 차에, 뿌리가 사람의 손바닥 모양이라서 그렇게 불린다고 안내자가 주석을 달듯 알려주었다. 희귀하고 귀중한 야생화라서 캐볼 수는 없었지만 그냥 쉽게 이해가 됐다. 다른 야생화 팀의 안내자가 직접 한 뿌리를 캐서 일행들에게 보여주며 찍어둔 사진을 나중에 보게 되었는데 정말 손바닥 모양이었다. 선조들이 이 난초의 뿌리를 한약재로 사용해 오면서 뿌리의 모양으로 이름을 지었나 보다.


이어서 분홍바늘꽃과 키 꺽다리 수리취도 몇 개체 눈에 띄었고 말나리와 물매화도 여기저기서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양치류 군락도 시선을 끌었는데 후에 확인해 보니 음양고비라고 했다. 양치류는 종류가 참 많을 뿐만 아니라 구분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양치류라고 부르며 만족해한다. 초원은 가끔 작은 나무들에게도 공간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중 내 눈에 띈 것은 야광나무와 아광나무였다. 야광나무는 한국의 산지에 많이 서식하는 사과나무속 식물이지만, 이름이 한 획 차이인 아광나무는 산사나무속 식물로 모양이 서로 많이 달랐다. 아광나무의 잎과 열매는 산사나무와 너무 유사해서 처음에 산사나무로 동정했던 게 결코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좌) 손바닥난초 (우) 아광나무

인가목과 유사하지만 열매가 둥근 모양인 생열귀나무도 관찰하고 약간은 시들어가는 듯한 금매화도 여러 곳에서 만나며 한 시간여를 걷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왕지에 다가가고 있었다. 청나라를 건국한 누루하치가 목욕하고 마시며 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을 담고 있는 왕의 연못! 영웅들에게는 늘 온갖 전설이 뒤따르지만, 지금의 연못은 그 크기나 물색에 있어서 그토록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연못과 그 주변에는 우리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야생화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왕의 걸음으로 천천히 연못을 한 바뀌 돌며 생각에 잠기다가 작은 언덕을 넘어 다시 데크길로 접어들었다.

왕지 전경

왕지에서 조금 벗어난 야생화 초원에는 공원관리자 한 명이 자리를 잡고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희귀야생화들이 좁은 공간에 함께 서식하고 있었다. 또 경사면에 작은 구멍이 하나 보였는데 입구 한 켠을 얇은 돌이 지탱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로 다가와서 스마트폰에 담긴 동영상을 보여 주었는데, 다람쥐나 쥐 모양의 작은 동물이 뭔가를 물고 그 구멍을 들락거리는 모습이었다. 의사소통은 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찍은 그 동영상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물의 이름은 북방우는토끼(Northeast pika)라는 멸종위기 희귀동물이었고 그 관리자의 임무 중 하나는 그 동물의 서식지가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키는 일이었을 게다.


북방우는토끼 서식지 주변에는 여러 희귀야생화들이 함께 서식하고 있었다. 비로용담도 보였고 손바닥난초도 있었으며 물매화 꽃 봉오리도 많았고 함경딸기 잎과 멍덕딸기 잎도 관찰되었다. 게다가, 이번 탐사에서 무척 고대했었지만 이미 철이 지나서 볼 수 없었던 장백제비꽃의 잎도 여러 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나도씨눈란도 함께 서식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곳을 벗어나서 공원입구로 향하며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몇 가지 야생화들도 사진에 담았다. 만삼을 야생에서 처음 보았고 희귀한 자병취도 관찰했으며 부드러운 분홍 색감의 구름패랭이꽃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좌) 북방우는토끼 서식지와 주변 야생화 (우) 만삼

셔틀버스를 탔다가 우리의 관광버스로 갈아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속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내일이 탐사여정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일 거다. 안내팀은 백두산에 대한 우리의 여전한 목마름을 아는 듯 멀리 백두산 실루엣이 보이는 작은 휴게소에 정차를 했다. 해 질 녘의 백두산 능선은 어렴풋이 보이는 정도였지만 모두들 그 어렴풋함을 사진과 마음에 담고는 담담한 마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휴게소 언덕에서 보는 해질 녘 백두산 능선은 하늘과 구분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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