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최근 한국 사회는 공정과 정의를 많이 찾는다고 느낀다. 정말로 2030 세대들이 불공정에 분노하는 것인지는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이라는 키워드를 미디어를 통해서 끊임없이 접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각종 불공정 사례를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는 진영 싸움이 아니라, 정의가 무엇이고 공정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찰해야 할 것이다. 몇 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상에서 우리 사회는 정의를 갈구하며 탐구할 자세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로 공적인 장에서 건설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대학 입학 시, 사회취약층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는가를 다룰 때, 우리는 이에 대한 충분한 이론적 바탕을 전제로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 자신의 이익과 감정에 치우쳐서 찬반을 결정하고 사건의 본질에는 다다르지 못하고 피상적인 감정싸움만 할 뿐이다. 학창 시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롤스 등 정의에 관한 이론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문제에서 제대로 활용해서 사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특히 유튜브를 비롯한 동영상이 지배적인 현대사회에서는 사건이든 지식이든 모든 것이 휘발성이 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무엇을 짚고 넘어가야 할까? 당장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로 부의 양극화, 환경오염, 사회 단절 등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조건으로부터 파생된 결과물일 뿐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보다 본질적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갖는 기능과 함의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우선 자본주의를 살펴보면, 우리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경제체계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므로 현실에서 이보다 확고하고 본질적인 이데올로기는 없다. 그렇기에 부의 양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를 갈구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강력한 욕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갑질’로 대변되는 여러 사회 문제들과 이를 반영하는 미디어로 충분히 알 수 있다. ‘펜트하우스’에 나오는 재벌과 그들이 행하는 갑질과 순수한 욕망 충족 행위에 대한 카타르시스는 시청자들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리고 최근 흥행한 ‘오징어게임’ 역시, 자본주의의 냉혹함과 그 속에서 낙오된 이들의 처절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문화와 인종을 가리지 않고 공감을 얻고 흥행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에 자본을 소유한 이들은 더욱 큰 자본을 얻게 되고, 이 자본을 얻기 위해서는 자연을 개발하고 개간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에 따라 팽배해지는 ‘물신주의’는 돈을 최고라 여기고, 이를 소유한 자가 우월한 존재로서 군림하게 만든다. 어린아이들이 임대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을 ‘휴먼시아’와 ‘거지’의 합성어로 ‘휴거지’로 부르는 현상은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동안 민주주의가 모든 시민은 동등한 천부인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이를 조절하거나 누그러트리는 역할을 수행했었다. 그러나 최근의 흐름들을 보면 민주주의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조절하는 개념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을 감추고 위장하는 역할이 더 커진 것 같다. 더 이상 돈의 유무에 따라서 사람들을 평가하고 차별하는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결국,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또는 경제와 정치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라 본다. 만인은 모두 평등하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며, 돈은 단순한 생활을 위한 수단인 민주주의 이념이 우선되는 사회가 좋을까, 아니면 돈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진다는 것은 우리 모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모두 한 표를 던질 수 있고 명목상으로 신분은 철폐되었으므로 사람 간에는 위계가 없다고 위안 삼으면서 사는 사회가 나을지는, 양으로 봐도 질로 봐도 명확할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의를 비판했다고 이를 철폐하자고 주장한 것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본주의의 끝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어떻게 변화할지 결정하는 것은 자본주의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중에 한 구성원으로서 자본주의의 심화과정을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마냥 지켜만 보기에는 냉혹한 구조 속에 무력한 한 주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끄적여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