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와, 엘레나."
문 안쪽에서 마라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바로 곁에 선 마라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짧은 칼이 들려 있었고, 칼끝은 뒤쫓아오는 검은 배들을 향해 있었다. 진짜 마라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문 안의 목소리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내 목소리 훔쳐 쓰는 거 기분 더럽네."
엘레나는 손바닥을 문에 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손목을 타고 팔 안쪽까지 올라왔다. 문은 그녀의 이름을 핥듯 훑었다.
엘레나 윈드리프.
윈드콜러.
아르카누스 0번.
마지막 열쇠.
각 이름이 피부 아래에서 따로 울렸다. 그중 몇 개는 그녀가 받은 이름이 아니었다. 붙여진 번호였고, 절차였고, 누군가의 목적이었다.
문 안쪽의 마라가 웃었다.
"네가 놓으면 편해져. 이름이 많으면 아프잖아."
진짜 마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건 내가 아니야."
"알아."
엘레나는 문을 보았다.
"마라는 저런 말 안 해."
"그럼 나는 뭐라고 하는데?"
마라가 물었다.
엘레나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밥 먹고 하라고 하지."
"정답."
마라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웃음이 닻처럼 엘레나를 붙잡았다. 문에 깔린 검은 빛이 한 번 흔들렸다.
뒤에서 검은 배들이 가까워졌다. 세이라의 목소리가 파도 위를 지나왔다.
"문을 열게 두지 마라. 열쇠가 선택하면 왕의 길이 늦어진다."
검은 배 앞머리에서 교단원들이 물 위로 뛰어내렸다. 그들의 발밑에는 그림자가 딱딱하게 굳어 길을 만들었다. 마라는 칼을 바꿔 쥐었다.
세이라는 배 난간 위에 서 있었다. 검은 장막은 젖지 않았다. 바닷물이 닿기 직전 어둠이 물을 밀어냈다. 그녀는 엘레나가 아니라 문을 보고 있었다. 사람보다 절차를 먼저 보는 눈이었다. 이요라에게 배웠고, 데미안에게 빼앗긴 눈.
"엘레나 윈드리프!"
세이라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직접 불렀다.
"네가 열면 카이는 죽는다. 아이는 찢긴다. 그래도 네 선택이라고 부를 건가?"
엘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독이었다. 동시에 일부는 사실이었다. 문 안쪽의 대가는 아직 정확히 보이지 않았고, 카이의 몸은 계속 사라지고 있었다. 크로노스의 박동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마라가 대신 소리쳤다.
"남의 선택 걱정하기 전에 네 왕한테 네 이름이나 돌려받아!"
세이라의 장막 끝이 물 위에서 멈췄다. 그 짧은 틈에 마라가 앞으로 뛰었다.
"나는 뒤를 막을게."
"혼자?"
"너희 셋 중에 칼 제대로 드는 사람이 지금 나뿐이잖아."
카이가 검을 들어 올리려 했다. 검끝이 흔들렸다. 그의 왼쪽 어깨는 이제 옷깃 안쪽까지 비어 있었다. 금빛 선이 목덜미를 넘어 턱 아래로 올라오고 있었다.
엘레나는 그를 보았다.
"안 돼."
"아직 오른손은 있다."
"그 오른손으로 나 잡아."
카이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검을 내렸다. 남은 손이 엘레나의 손목을 잡았다. 아주 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놓지 않았다.
마라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둘 다 살아서 들어가. 살아서 나와. 순서 헷갈리지 말고."
문이 열렸다.
틈새 너머에는 방이 없었다. 바다도 없었다. 오래된 기억들이 서 있었다.
첫 번째 문지기는 할머니였다.
스톰엔드의 작은 집, 약 냄새, 젖은 장작 냄새. 어린 엘레나가 침대에 누워 있었고, 할머니는 숟가락으로 검은 약을 먹이고 있었다. 약을 삼킬 때마다 어린 엘레나의 손등에서 바람 표식이 흐려졌다.
기억 속 할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살리고 싶었다."
엘레나는 숨을 멈췄다.
"그러니 너도 누군가를 살리려면 빼앗아야 한다. 아이의 조각을 빼앗아 카이를 살려라. 사랑은 늘 누군가에게 약을 먹이는 일이다."
카이의 손이 엘레나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
"듣지 마."
엘레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주름, 떨리는 손, 감춰 온 죄책감. 진짜 할머니가 가진 것들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할머니의 말이 아니었다.
"아니."
엘레나는 기억 속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는 내 선택을 늦췄어. 하지만 나를 대신해서 마지막 선택을 하려 하지는 않았어."
기억 속 할머니의 손이 떨렸다. 검은 약그릇 너머로 아주 짧게, 진짜 기억의 표정이 떠올랐다. 어린 엘레나의 이마를 닦아 주던 손. 약을 먹인 뒤 문밖에서 혼자 울던 등. 할머니는 틀렸고, 숨겼고, 엘레나의 삶을 좁혔다. 그래도 사랑을 핑계로 모든 선택을 끝까지 빼앗으려 한 사람은 아니었다.
엘레나는 그 차이를 붙잡았다. 용서와 판단을 섞지 않기 위해서였다.
검은 약그릇이 바닥에 떨어졌다. 방이 흩어졌다.
두 번째 문지기는 카이였다.
그는 피 묻은 검을 들고 있었다. 엘레나는 그 장면을 이미 보았다. 999개의 기억 속에서, 그가 그녀의 심장을 찔렀던 밤. 그러나 이번에는 기억 속 카이가 엘레나가 아니라 현재의 카이를 바라보았다.
"다시 해."
"네가 죽으면 엘레나는 산다. 네가 크로노스의 조각을 넘기면 둘은 산다. 네가 선택하면 실패가 줄어든다."
카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엘레나는 그의 손이 식는 것을 느꼈다. 카이의 목덜미에 올라온 금빛 선이 턱을 지나 입술 근처까지 번졌다. 그는 자기 기억과 맞서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죄가 문지기로 서 있었다.
"나는..."
카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선택을 대신하지 않는다."
기억 속 카이가 웃었다.
"그럼 아무것도 못 지킨다."
"그럴 수도 있지."
카이는 피 묻은 검을 더 낮게 내렸다.
"그래도 다시 찌르지는 않아."
피 묻은 검이 금빛 먼지로 흩어졌다. 기억 속 카이도 함께 무너졌다. 현재의 카이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이 바닥을 짚었다. 손가락 끝에서 금빛 가루가 떨어졌다. 엘레나는 그 가루가 카이의 몸에서 나온 것인지, 문 안쪽의 태양석에서 떨어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네 죄를 내가 없애 주지는 못해."
카이는 고개를 들었다.
"알아."
"하지만 네 죄가 내 선택을 대신하게 두지도 않을 거야."
그는 그 말을 듣고서야 짧게 숨을 내쉬었다. 카이는 구원을 바란 얼굴이 아니었다. 처벌을 바란 얼굴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자기 죄가 결론이 아니라 조건이 되는 자리에 서 있었다.
엘레나가 그를 붙잡았다.
"카이."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가슴 안쪽에서 작은 박동이 들렸다.
쿵.
아주 희미했다.
쿵.
카이의 눈이 열렸다.
"크로노스."
엘레나는 귀를 기울였다. 바람 사이로 아이의 박동이 들렸다. 카이의 심장과 같은 박자로 뛰고 있었다. 하나가 늦어지면 다른 하나가 끌려갔다. 크로노스가 살아 있어 카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둘은 같은 균열의 양쪽 끝에서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그 아이가 안쪽에 있어."
"데미안 곁에."
세 번째 문지기는 엘레나 자신이었다.
문 안쪽 깊은 곳에 열쇠가 서 있었다.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없었다. 머리카락도, 눈도, 입도 없는 몸. 가슴에는 봉인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표식 아래에 수많은 이름이 매달려 있었다.
엘레나.
윈드콜러.
문.
열쇠.
0번.
구원자.
재앙.
그것은 엘레나의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만 남겨."
엘레나는 숨을 고르며 걸어갔다.
"하나만 남기면 편해진다. 열쇠는 열리면 되고, 문은 닫히면 된다. 사람은 너무 많은 관계를 들고 있어서 부서진다."
"나는 부서져도 내가 들고 갈 이름을 고를 거야."
"그럼 문은 열리지 않는다."
"열 거야."
엘레나는 손을 들어 자기 가슴에 올렸다.
"하지만 네가 요구한 방식으로는 아니야."
얼굴 없는 열쇠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름을 내라."
"내 이름은 절차가 아니야."
엘레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엘레나 윈드리프. 스톰엔드에서 태어났고, 마라의 손을 잡았고, 할머니의 약을 삼켰고, 카이의 죄를 기억하고, 크로노스의 이름을 불렀다. 열쇠로 만들어졌어도 무엇을 열지는 내가 정해."
말이 끝나자 그녀의 발밑에서 바람이 일어났다. 문지기 열쇠의 가슴에 새겨진 봉인 표식이 갈라졌다. 매달려 있던 이름들이 끊어져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엘레나의 주위로 돌아와 원을 만들었다.
카이가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는 손바닥을 자기 가슴에 올렸다.
"박동이 커졌어."
검은 공간 너머에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울음은 소리가 아니라 빛이었다. 태양석 조각이 뛰는 빛. 엘레나는 그 빛을 향해 달렸다.
뒤쪽에서 마라의 고함이 들렸다.
"빨리 가!"
엘레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멈출 것 같았다. 마라가 교단원 둘을 밀쳐 내고, 세이라의 검은 장막이 문턱까지 따라붙는 것이 바람 끝으로 느껴졌다.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세 번 났다. 마라의 숨이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세이라는 문턱을 향해 손을 뻗었고, 검은 장막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마라는 그 장막을 몸으로 막았다. 짧은 칼은 장막을 베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장막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세이라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도 누가 대신 정해 주는 거 지겹지 않아?"
마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세이라의 눈이 흔들렸다.
"닥쳐."
"못 닥쳐. 내 전문 아니야."
그 대답이 문 안쪽까지 들어왔다. 엘레나는 웃을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가 등을 밀었다. 마라가 살아 있다는 확인. 아직 뒤가 버티고 있다는 증거.
카이가 옆에서 비틀거렸다. 엘레나는 그의 허리를 받쳤다. 그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목덜미의 금빛 선이 입가를 지나 왼쪽 눈 아래까지 닿았다.
"조금만 더."
"이번엔 내가 말하네."
카이가 겨우 대답했다.
그들은 빛의 끝에 닿았다.
폭풍의 요람 안쪽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천장은 밤하늘처럼 높았고, 바닥에는 마른 바람의 결이 겹겹이 굳어 있었다. 중앙에는 태양석 핵이 떠 있었다. 심장만 한 조각이 아니었다. 작은 태양이었다. 그 안에서 크로노스의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태양석 핵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옷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았다. 긴 머리도, 소매 끝도, 그림자도 모두 멈춰 있었다. 그는 엘레나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지친 사람처럼 평온한 눈을 하고 있었다.
데미안.
그는 웃었다.
"어서 와, 마지막 열쇠."
태양석 핵 안에서 크로노스의 박동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데미안이 손을 내밀었다.
"이제 열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