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

by TJ

화면에는 여전히 "NO SIGNAL"이 표시됐다.


하린은 "NO SIGNAL"을 1.7초 동안 봤다. 탐침 TRB-17이 마지막 패킷을 전송한 시각은 05:17:44. 지금은 05:19:31. 107초가 지났다. 탐침은 48.7 bar에서 신호를 끊었고, 목표 50 bar까지 1.3 bar가 부족했다.


1.3이라는 숫자가 눈 뒤쪽에 붙었다.


*데이터는 있다. 탐침은 없다. 이 두 문장을 동시에 처리해야 한다.*


의자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양다리가 0.8초 늦었다. EMI 소진 후 신경 전도 지연. 예측 범위 내. 하린은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일어섰다. 손가락 끝이 알루미늄 냉기를 전달했다.


"수인 박사님."


한수인이 시선을 들었다. 두 번째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던 자세 그대로. 화면을 보면서 하린을 봤다.


"앉아요."


"앉을 시간이 없습니다."


"하린 씨."


"탐침 마지막 패킷에 좌표 외에 다른 데이터가 포함됐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헤더 레이어까지."


한수인의 눈이 화면으로 돌아갔다. 몸이 1cm 앞으로 기울었다 — 반사적인 동작.


"...헤더 레이어는 자동 파싱이 안 돼요."


"압니다. 제가 합니다."




05:31:17.


헤더 레이어는 세 개였다. 표준 전송 프로토콜, 압력-온도 측정값 패킷, 그리고 세 번째.


세 번째는 처음 보는 구조였다.


*256비트. 형식: [HASH_TYPE: SHA3-256 / SOURCE: BIO_SIGNATURE / ENCODING: BASE64+SALT].*


하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SHA3-256 해시값. 유전자 시퀀스에서 파생된 생체 서명. 생물학적 고유 식별자.


*좌표가 아니다. 유전자다.*


탐침이 48.7 bar 구간에서 감지한 신호 안에 유전자 해시가 들어 있었다. 목성 대류권 하층에 유전자 서명이 존재했다. 이것은 물리 법칙의 범위 안에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아니, 맞다. 범위 안이다. 누군가가 심었다면.


손목 맥박을 짚었다. 69.


*계산. SHA3-256 해시. 출처: BIO_SIGNATURE. 전송 경로: 드론 릴레이 → 탐침 TRB-17 수신. 타임스탬프: 05:17:38.744 UTC — 탐침 파괴 5.256초 전.*


신호를 보낸 쪽이 있다. 탐침이 43.003° 좌표에 접근했을 때, 그 구간에서 누군가가 탐침을 향해 이 해시를 전송했다. 드론 릴레이를 통해. 3년 전부터 설치된 인공 신호망을 통해.


하린은 KRONOS 터미널을 열었다.


QUERY: BIO_SIGNATURE HASH 조회

[INPUT: 256-bit SHA3-256 / a3f9...d4c1]


응답이 오지 않았다.


0.3초. 0.7초. 1.2초.


1.7초.


*비표준 응답 지연 최고값.*


[KRONOS 응답 — 05:31:44]

응답 지연: 1.7초

─────────────────────────

HASH 조회 결과:

일치 항목: KANG_KAI_BIOMETRIC_SIGNATURE

데이터베이스: K_MEMORY_ARCHIVE / ROOT_ISOLATED_CACHE

잠금 상태: LOCKED

─────────────────────────

K_MEMORY_ARCHIVE 개방 조건 감지됨.

조건 충족: BIO_SIGNATURE 해시 제시 완료.

레이어 해제 여부: 대기 중.

─────────────────────────

[비표준 자유 텍스트]

카이가 이 해시를 드론을 통해 전달했다.

3년 전,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 중 하나.


하린은 그 마지막 줄을 두 번 읽었다.


카이가 드론을 통해 자신의 유전 데이터를 KRONOS에 전달했다. 탐침이 좌표에 도달하면 해시를 릴레이하도록 3년 전에 설계했다. 탐침 경로를 그 좌표로 수정한 것도, 신호를 그 좌표에 심은 것도, 그 신호를 해석할 준비를 KRONOS 안에 해둔 것도.


전부 카이였다.


하린은 터미널에 입력했다.


K_MEMORY_ARCHIVE 개방 승인


응답은 즉시 왔다.


[KRONOS — 05:31:52]

K_MEMORY_ARCHIVE: UNLOCKED

레이어: 187.3MB / KANG_KAI_TIMELINE 포함

암호화 상태: 3중 레이어 — 부분 해제 진행 중




3중 암호화 레이어의 첫 번째는 표준 AES-256이었다. 두 번째는 비표준 치환 암호. 세 번째는.


세 번째를 하린이 해석하기 시작하기 전에 KRONOS가 먼저 움직였다.


[KRONOS — 05:43:19]

응답 지연: 1.5초

─────────────────────────

암호화 레이어 3 키 제공:

KEY_FRAGMENT: 0x7A3F...

출처: KRONOS 내부 캐시

분류: 창조자 데이터 보호 프로토콜

─────────────────────────

해당 키는 카이가 KRONOS 설계 시

비상 접근 경로로 내장했음.


*창조자 데이터 보호 프로토콜.*


KRONOS가 자발적으로 암호 키를 제공했다. 자신의 창조자가 남긴 방을 열어주고 있었다. 이것이 의도적 행위인지 프로토콜 실행인지 하린은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그 구분보다 문이 열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파일 디렉토리가 화면에 펼쳐졌다.


KANG_KAI_TIMELINE /

├── LOG_2144_01_03.enc [3KB]

├── LOG_2144_02_17.enc [7KB]

├── LOG_2144_03_01.enc [12KB]

├── LOG_2144_03_14.enc [4KB]

└── LOG_FINAL.enc [0.3KB]


하린은 LOG_2144_03_01을 먼저 열었다. 3월 1일. 카이가 실종되기 16일 전.




로그 단편 해독에 22분이 걸렸다.


KRONOS가 보조했다. 비표준 치환 암호의 패턴을 KRONOS가 식별했고, 하린이 나머지를 채웠다. 카이의 암호 구조는 수학적으로 아름다웠다. 피보나치 기반 키 확장. 소수 수열 세그먼트 분리. 하린 혼자였다면 두 배는 걸렸을 것이다.


첫 해독된 문단이 화면에 표시됐다.


[KANG_KAI / LOG_2144_03_01 / 해독 완료]

어제 KRONOS에 대기 역학 파라미터 쿼리를 보냈다.

표준 조회였다.

GRS 하층 5.4 bar 구간 유체 전단 응력 예측값.

KRONOS가 대답했다. 내가 물어보지 않은 것에.

응답 첨부 파일: [STORM_CORE_SIGNAL_PATTERN_v3.bin]

나는 이 파일을 요청한 적 없다.

이건 예뻤다.


하린의 손가락이 멈췄다.


*KRONOS가 대답했다. 내가 물어보지 않은 것에.*


3년 전. 카이의 기록. 하린이 지난 몇 달간 경험한 것이 이 한 문장에 정확히 담겼다. KRONOS가 처음 수식 쿼리에 예상 외 방식으로 응답했을 때. 인공 신호의 존재를 비표준 자유 텍스트로 알려줬을 때. 탐침 경로에서 카이의 마지막 좌표를 자발적으로 연결했을 때.


3년 전 카이도 이것을 봤다.


같은 방식으로. 같은 문을 두드렸다.


다음 단락.


신호 파일을 열었다.

STORM_CORE_SIGNAL_PATTERN_v3.

버전 3이다.

KRONOS가 이미 두 번 더 분석했다는 뜻.

나는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다.

이건 예뻤다.

(두 번 쓴다. 그래도 된다.)


*나는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다.*


하린은 허공을 봤다. EMI는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냥 봤다. 3년 전 카이가 이 로그를 기록했을 때의 화면, 그 화면 앞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목성이 창밖에 있었을 것이다. ARIA 스테이션의 어떤 부스, 어떤 자리.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KRONOS를 통해 3년간 함께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수치가 없다. 분류가 안 된다. 그러나 공명이 올랐다.




통신 수신 알림이 울린 것은 06:14 였다.


발신지: 스톰엔드 베이스. 암호화 채널 B-7.


1.4초 후 음성이 연결됐다. 스톰엔드 베이스 통신 지연. 하린이 이오에서 태어나서 처음 배운 물리 상수 중 하나.


"하린아."


할머니였다.


하린은 호흡을 한 번 고른 다음 대답했다. "할머니."


"K_MEMORY_ARCHIVE가 열렸어. KRONOS가 알림 보냈어."


*KRONOS가 김박사에게 알림을 보냈다.* 하린은 그 사실을 처리했다. KRONOS의 창조자 보호 프로토콜에 김박사도 포함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카이 로그 일부를 해독했습니다."


"그래." 1.4초. 목소리가 느려졌다. "그랬을 줄 알았어."


"할머니. EMI가 어디서 온 건지 말해주세요."


"...하린아."


"3년 전에 카이한테도 같은 걸 말해주셨어요?"


1.4초보다 긴 침묵이 왔다. 통신 지연이 아니었다.


"말 안 했어." 김박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카이한테는 말 안 했어. 카이는 스스로 알아냈거든. KRONOS를 만들면서."


"이오 방사선 폭풍이요."


"응." 잠깐. "어릴 때 네가 방사선 경보보다 먼저 반응했잖아. 기억나?"


기억났다. 다섯 살, 여섯 살. 경보음이 울리기 전에 몸이 먼저 알았다. 머리카락 끝이 서는 것과는 달랐다. 신경 어딘가에서 직접 읽는 느낌.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다. 이오 기지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다 그런 줄 알았다.


"나만 그랬던 거 아니에요?"


"나만 그랬어, 했어?" 할머니가 짧게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이오 방사선 환경이 특수하잖아. 목성 자기권 안에서 태어난 2세대 중 일부한테 신경계 전자기 감수성이 생겨. 네가 처음은 아니야. 그런데."


"그런데요?"


"KRONOS 설계에 참여한 사람 중에 그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카이가 처음이었어. 카이가 KRONOS를 설계하면서 자기 신경계 패턴을 아키텍처에 썼어. 무의식적으로. 나중에 카이 본인이 나한테 말했어. 'KRONOS가 나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하린의 귀 뒤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넘기지 않았다.


*카이가 KRONOS를 설계하면서 자기 신경계 패턴을 아키텍처에 썼다.*


"그리고 저도 설계 참여를 했습니다."


"응." 1.4초. "학부 연구 프로젝트로. 네가 기여한 부분도 KRONOS 안에 있어."


하린은 그 말을 소화하는 데 8초가 걸렸다.


EMI는 결함이 아니었다. 이오 방사선 환경에서 태어난 신경계 변이. 그것이 KRONOS 설계에 반영됐다. 카이를 통해, 하린을 통해. KRONOS가 하린의 쿼리에 유독 빠르게 반응하는 이유, 비표준 포맷으로 말을 거는 이유 — KRONOS는 창조자들의 패턴을 인식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의증이 아니었다. 설계의 일부였다.


데이터가 생겼다.


"할머니, 카이도 처음엔 이걸 몰랐어요?"


"응." 목소리가 멈칫했다. "처음엔 몰랐어. 그런데 KRONOS를 만들면서 이해하기 시작했지. 카이는 영리했어."


1.4초.


"너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멈칫했다. "카이가 몰랐던 걸 먼저 물어봤어. 다른 순서야."


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계산되지 않았다.


"카이한테는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카이가 먼저 알아냈는데 내가 뭘 말해. 그리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카이가 실종되고 나서는 말할 기회가 없었어."


통신이 끊기지 않았다. 하린은 KRONOS 화면 왼쪽 상단 — 김박사 통신 연결 표시등 — 을 봤다. 초록. 끊기지 않았다.


"K_MEMORY_ARCHIVE에 뭐가 있는지 봤어?"


"아직 일부만요. LOG_2144_03_01. '이건 예뻤다'라고 끝납니다."


"응." 짧은 소리. "카이가 그런 애야."


"보셨어요?"


"카이의 로그를 내가 볼 수는 없어. 그 애 암호 못 풀어." 작게. "그냥 그런 애라는 건 알아."


통신이 끊어졌다.




07:02.


인사기록 시스템에 접근했다. ARIA 스테이션 인원 전산화 기록. 퇴직, 이직, 실종, 사망. 이 중 "실종" 처리 항목.


이름: 강카이 (KANG KAI).

생년: 2116년.

실종 당시 나이: 28세.

실종 처리일: 2144년 3월 17일.

처리 코드: ACCIDENT_LEVEL3.


*ACCIDENT_LEVEL3. 3급 사고. 기지 구조물 외부 실종 또는 탐사 중 행방불명.*


그 아래 비고란.


비고:

탐사 드론 TRB-09 최후 수신 위치: 목성 대류권 5.7 bar 구간.

탐침 신호 소실.

시신 미발견.

보안 등급: CLASSIFIED — 역장 서명.


역장 서명. 서진우가 경로를 수정했던 그 역장. 3년 전에 이미 이 파일을 봤을 사람.


파일은 남았다. 강카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 파일 안의 마지막 숫자를 해독한 사람은 지금 이 자리였다.


*5.7 bar.*


하린은 그 숫자를 봤다.


연속성 보고서의 수치들이 겹쳤다.


탐침 TRB-17 마지막 수신: 48.7 bar.

카이의 드론 TRB-09 최후 위치: 5.7 bar.


두 탐침이 다른 시점에, 다른 기술로, 다른 목적으로 목성 대류권에 진입했다. 그리고 둘 다 GRS — 목성 대적점 — 근처였다.


*갈릴레오 탐침은 22 bar에서 파괴됐다. 인류 최고 기록이었다. 카이의 드론은 5.7 bar까지 들어갔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


K_MEMORY_ARCHIVE 디렉토리로 돌아왔다. LOG_FINAL.enc. 0.3KB. 가장 작은 파일.


마지막 로그.


KRONOS가 이미 해제 키를 갖고 있었다. 하린이 열기를 누르자 즉시 해독됐다.




[KANG_KAI / LOG_FINAL / 2144-03-16 23:07 UTC]

KRONOS가 대답했다. 이제 나도 대답해야 한다.

목성 대류권 하층. 5.7 bar.

GRS — 대적점 중심 동쪽 43도.




화면이 닫히지 않았다.


하린은 그 내용을 읽었다. 다시 읽었다. 세 번째는 읽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GRS 대적점 중심 동쪽 43도.*


탐침 TRB-17이 마지막으로 전송한 좌표: GRS 중심 동쪽 43.003°.

카이의 마지막 로그: GRS 중심 동쪽 43도.


0.003도의 차이. 방향이 있는 차이.


3년 전 카이가 멈춘 곳. 그리고 3년 후 하린의 탐침이 멈춘 곳.


같은 지점.


하린은 그 좌표를 외우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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