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트니 미술관에서
"줄 엄청 긴데? 시간 안에 들어갈 수 있겠어?"
내가 물었다.
"음. . . 10분 남았긴 한데, 모르겠네."
1년 내내 주요 관광지들은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뉴욕, 게다가 주말인 휘트니 미술관 앞은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네 명 정도 되는 직원들은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의 질문에 답하느라 바빴다. 오후 네시 반, 하늘에 둘러싸인 구름은 당장이라도 비를 쏟을 것만 같았다. 난 이 순간 내 지갑에 꼭 있어야 할 하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학생증 안 들고 왔는데."
"그래? 내가 말해볼게."
만약 세계 여행을 떠날 생각이라면 그 어느 곳이든 학생증을 꼭 챙겨가자. 훨씬 저렴한 가격에 각종 문화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안내데스크에서 B는 나를 같은 학교 다니는 친구라 소개했고, 난 그 덕에 저렴한 가격으로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린 코트와 가방을 맡기고 행사가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행사는 건물 2층의 초콜릿 쿠키가 준비되어 있을 것 같은 작은 다목적실에서 진행되는 듯 했다. 커다란 대강당 안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기대한 나로서는 의외였다. 게다가 방 안에는 행사시간 10여분이 지났음에도 미술관 직원으로 보이는 두 젊은 백인 여성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우린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Talk 행사 진행되는 곳인가요?"
B가 물었다.
"네 맞아요. 들어와요."
명찰을 패용한 직원들은 웃으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난 오늘 행사 진행을 맞게 된 큐레이터 제이미라고 해요. 이쪽은 애니구요."
우리도 각자 소개를 했다. 제이미는 간략히 어떤 행사인지를 밝혔다. 요약하면 지미 더햄이 조각한 아메리카 원주민 예술작품의 윤리성을 논하는 자리였다.
나는 행사 공간을 이리 저리 둘러보고 말했다.
"솔직히 놀랐어요. 저는 커다란 홀에 사람들이 가득 차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을 상상했거든요. 그런데 우린 십 분이나 지각했는데도 우리가 유일한 참석자네요. 열심히 준비하셨을텐데 실망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 행사에 먼 나라 한국에서 온 대학생 두 명이 여러분들 의견을 들으러 왔다는 것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여쭤보고 싶어요."
제이미는 웃으며 답했다.
"음. . . 이렇게 참석해 준 것만 해도 고맙지요. 저희에겐 누구나 다 손님이니까요. 저희도 기획할 당시만 해도 많은 분들이 오겠지 생각해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말이에요."
"맞아요. 우린 누구나 다 환영해요."
애니가 거들었다.
"어쨌든 참석해주셔서 고마워요. 이제 손님들도 준비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게요."
제이미는 본 행사와 문제가 되는 작가에 대해 설명하며 그의 작품들을 보여주었고, B는 졸업논문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질문들을 하였다.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인지 미술에 대한 소양부족인지 모를 어떤 이유들 때문에 나는 그들의 이야기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B는 녹음까지 해가며 그들과의 대화에 열중이었다. 난 그런 B가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난 그들의 대화에서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이 작가가 정말 아메리칸 원주민들을 위해 작품을 만든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사익을 위해 그들을 이용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난 그 때 호주에서 있었던 경험을 떠올렸다.
내가 말했다.
"난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이 사례와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얘기해보죠. 약 2년 전 나는 호주 칼굴리라는 광산촌에서 반 년 정도 지냈어요. 사막 한가운데 금광촌이죠. 그런 종류의 동네들이 보통 그렇듯, 그 곳엔 호주 원주민들이 모여 살아요. 동네 마트에 가는 길이면 길에 모여 앉아 있는 그들을 발견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아무튼 내가 그 도시에 정착한 처음 일주일간 나는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는데, 그 중 한 곳은 갤러리였어요. 호주 원주민을 주제로 운영하는 갤러리에요. 갤러리를 운영하는 화가는 원주민이 아니라 백인이에요. 여기까진 지미 더햄과 거의 비슷한 사례일거에요. 그런데 내가 그 갤러리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내가 마주한 첫 장면은, 그 화가 아주머니가 휠체어 탄 나이 든 원주민 할머니의 얘기를 들어주며 그녀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었어요. 그 화가 아주머니는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동네 다문화축제에 원주민 부스를 담당하고, 지역 언론에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여러분들이 예상하다시피, 원주민도 아닌 사람이 원주민을 상대로 예술활동을 한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들을 도우겠다는 진심이 있었으니까요. 나는 아직 지미 더햄의 조각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본 적도 없지만, 이 작가가 논란이 되는 부분은 진정성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내 얘기를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사례네요. 오늘의 주제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맞아요. 예술가들이 개인의 이익만 생각한다면 오늘처럼 윤리를 이야기하는 자리도 없겠죠. 예술가는 예술에 앞서 윤리를 먼저 고려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 사례처럼 지미 더햄이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좀 더 진정성을 보이고 활동했다면 과연 이 정도의 논란이 되었을까 생각이 드네요."
애니가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우린 마지막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했다.
B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지미 더햄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술관 측도 그 윤리적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나요? 어쨌든 휘트니 미술관은 이 전시를 1년간 하고 있잖아요. 그건 논란이 되는 작가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보여요."
"음. . .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릴게요. 미술관 공식 입장은 아니고요."
"그럼 명찰 잠시 내려놔야 겠네요."
내가 반 농담으로 제이미에게 말했다. 그들은 웃으며 명찰을 벗는 시늉을 했다. 제이미는 말을 이어갔다.
"맞아요. 말씀하셨듯 휘트니 미술관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단순히 작가에게만 윤리적인 문제를 씌우는 건 미술관으로서도 굉장히 무책임한 행동이니까요. 미술관은 오늘같은 행사를 열어 윤리에 대해 논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이 부분에 대한 공식 입장은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어요. 그건 윤리적 책임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톡을 마치고 B와 함께 그의 작품을 둘러보았다.
"이게 대표작이야."
나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알려진, 벌거벗은 조각상을 유심히 보았다. 대부분의 미술가들이 텍스트를 지양하는데 비해 이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이 워낙 많은지 작품 온 곳에 낙서를 갈겨놓았다. 인디언으로 보이는 그 나무 조각상엔 무지갯빛의 거대한 남성기가 달려있었고, 그는 이것을 "인디언의 페니스"라고 낙서로 알리고 있었다. 다른 부위도 마찬가지였다. "인디언의 젖꼭지"라던지. 나는 이 작가가 왜 욕먹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들의 입장을 대변한다면서 인디언 협회 회장까지 지냈던 이 외부인이 만든 조각상엔, 미술을 잘 모르는 일반 개인인 내가 보기엔, 인디언이 겪었던 아픔이나 고독보단 어마어마한 냉소와 조롱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