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보수의 상징

대구는 왜 보수의 아이콘이 돠었나.

by 바른

한 해가 가기 전 단풍을 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끊어내기 위해

대구 팔공산을 산행지로 선정하였다.

팔공산은 워낙 넓은 탓에, 등산코스를 비롯해서 많은 둘레길 코스가 개발되어 있다. 그리고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은 중생들의 소원을 잘 들어준다고 소문이 나서 전국각지에서 갓바위 부처님을 방문한다.

우리는 동화사에서 염불암으로 오르는 코스를 선택하였다. 동화사 주위에는 아직 가을 단풍이 남아있었지만, 높은 곳으로 오를수록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이미 겨울로 접어 들어가고 있었다.


대구를 보수의 심장이 되도록 만든 역사적인 사건은 6.25 전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물밀 듯이 쳐들어온 공산주의 세력을 마지막으로 막아선 전투는 낙동강 방어전선이다. 대구 부산만 유일하게 적의 수중에서 살아남아, 밀리면 끝장이다라는 심정으로 전투를 하였다. 대구 칠곡을 사수하기 위한 다부동전투, 영천 신녕 전투, 등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이는 6.25 전쟁사를 통틀어 가장 치열한 전쟁이었다고 한다.

배수의 진을 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 지역 사람들의 뇌리에는 공산당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살인자라는 생각이 가득 차게 되었다.

삼팔선 북쪽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뇌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이런 사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보수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모른다.


대구시의 옛 이름은 달구벌이다. 달구벌의 뜻은 ‘넓은 평야’를 말한다고 한다.

북쪽으로는 팔공산, 남쪽으로는 비슬산을 두고 중간에 하천이 가로지르는 넓은 평야는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곡물을 경작하기에 좋은 평야는 신석기시대부터 많은 인간이 모여서 살도록 허락하였다.

한 장소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여간해서는 장소를 옮기지 않는다. 농사를 시작하면 일손이 필요하고, 식구가 많은 것이 유리하므로, 형제자매도 멀리 갈 필요 없이 한 장소에서 거주하게 되어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씨족사회처럼 켜켜이 모여서 사는 도시가 되었다.


대구는 역사적으로 보면 역사의 소용돌이의 주역이 되었던 적이 없다.

신라시대에는 경주가 수도였고, 대구는 변방의 고을이었다.

백제와 목숨을 건 혈투를 할 때도 황산벌전투(논산), 관산성전투(옥천)등 은 멀리 떨어진 장소이었다.


고려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곳은 팔공산 주변이지만, 이 또한 남의 나라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서기 927년경 팔공산 일대에서는 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 사이에 매우 큰 전투가 벌어진다. 공산전투라고 불리는데, 이 전투에 관한 일화가 대구 곳곳에 남아있다. 이때는 이미 신라가 무너진 후였기에, 이는 고려와 백제 간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왕건이 큰 패배를 하여 쫓기게 되는데, 죽음의 일보 직전에 왕건의 목숨을 구해준 그의 수하 장군 신숭겸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만 부지하게 된다. 후에 왕건은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팔공산 자락에 그의 명복을 비는 지묘사를 세우게 되는데, 현제도 잘 관리되고 있다.


그 외에 임진왜란 와중에도, 부산으로 입성한 왜군이 한성으로 밀고 올라갈 때에도 대구는 그냥 지나치고 경상도 상주와 충청도 충주 근방에서 큰 싸움을 하게 된다.


오랫동안 한 장소에서 살다 보면 변화를 싫어하게 된다. 특히나 정치가 변하는 게 싫다. 보통 정권이 바뀌게 되면 자연히 숙청바람이 불고, 사람이 여럿 죽어나가는 일은 당연히 따라온다. 이런 현상을 겪게 되면서 정권이 교체된다는 일이 무척 싫어지게 된다. 지금 현제 내가 잘 먹고 잘살면 그뿐, 정권은 나와는 상관없게 된다. 이마도 이런 마음이 오랫동안 대구라는 도시에 쌓여온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라고 생각된다.


나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형제자매 친척에 대한 사랑, 모두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 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이기적인 사랑이 되어 버린다. 이기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만 더 넓게 시야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박애까지는 아닐지라도,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의 이익이 무엇이 될지를 한번 더 생각해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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