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와 우파의 싸움

보도연맹 학살사건

by 바른

빨갱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관한 어원으로서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는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맞는 것 같다. partisan 이란 군대의 정규군에 반대되는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이다. 즉 유격대를 부르는 말이다. 일체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을 파르티잔이라고 부른다면 맞는 말이 되겠다. 러시아식 발음은 빠르지 잔이 되며, 해방 후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유격대를 부를 때 빨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급격한 이념의 홍수 속에서, 즉 좌우의 극한대립으로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빨갱이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정권의 중앙에 있는 사람이 이 용어를 사용하면, 그 사람은 배척되고 없어져야 할 인물로 지칭하게 되었다. 이를 이용하여 정치가들은 상대방을 빨갱이로 덮어 씌어서 사회에서 영구 추방시키려는 의도로 많이 사용되었다.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면 자기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밀어내야 하는데, 이때에 그들은 상대를 빨갱이라고 몰아가면서 여론으로 밀어 붙임과 동시에 빨갱이들을 지하세계로 가두어서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승만 정권 시절 우익 정권은 사회를 안정화시킨다는 명목으로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즉 좌파들을 모두 빨갱이로 몰아갔다. 그중에는 독립운동을 하던 인사들도 상당수 끼어있었다고 한다. 좌파들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보도연맹이라 것을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민중들의 지식수준이 낮은 때이어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명확한 이념에 대한 정의도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보도연맹이란 예전에 공산주의이었던 사람이 이제 마음을 돌려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약속하고 자백시키는 의식이다. 그 당시 정부에서는 대중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도록 독려를 하여 가능한 한 많이 가입시키도록 지시하였다.

덧붙여 가입 시에는 물질적인 혜택을 주도록 하여서, 빈민층이 많이 가입하였다고 한다.

사실 진정한 좌익 골수분자들은 대부분 숨어버리고, 보도연맹 가입자 대다수는 속아서, 몰라서, 강제권유를 받고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6.25 전쟁이 터진 후에 도망가기 전에 정부는 보도연맹가입자를 모두 학살하라고 명령 내리지 않았나 추측된다.

경산 코발트광산, 대구 가창골, 제주도 및 전국각지에서 많은 양민들이 죽었다.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아직도 명확히 규명이 안되고 머물러 있는 상태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치하에서 벗어나면서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봉직한 점은 분명히 칭찬해 주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칭찬을 계속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친일인맥을 확실히 정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음에도 이를 끝까지 지속시키지 않고 결과도 없는데 돌연 중간에 이유도 없이 해산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해외에서 공부한 석학이며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매우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권력욕이 많아서 그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을 주위에 둘러 세웠다. 6.25 전쟁 발발 시 가장 먼저 수도권을 빠져나가 한강대교를 폭파시킨 사람이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권력을 거머쥔 친일인사들은 반대편에 대한 무한 살육을 감행하였다.

또한 정권에 맞선 사람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갔다.


6.25가 한창 진행 중에 병력이 부족함을 느낀 정부는 병력확충 계획을 발표한다. 1950년 12월 21일 공포 실시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의하여 군인, 경찰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 장정들을 제2국 민병에 편입시키도록 하였다.

서울에서만 무려 50만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모으긴 했으나, 중공군의 대공세로 또다시 서울을 빼앗기게 된 정부는 방위군 장병들을 대구·부산 등으로 신속히 이동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들은 추운 겨울에 걸어서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도보로 남쪽으로 이동 중에, 불과 100여 일 사이에 50만의 방위군 장병 중 무려 약 12만여 명이 사망(아사)했고 20만여 명이 동상에 걸렸다. 양곡권을 주었지만, 어디 가도 먹을 것은 없었다. 홑바지 저고리 차림으로 굶주림과 혹한 속에서 장정들은 하나둘 쓰러지며 죽음의 행진을 하였다. 국방부가 사망자는 1,234명이었다고 발표했지만, 38만여 명에 달하는 낙오자의 행방은 언급하지 않았고, 언론 등에서는 5만에서 12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국민방위군의 고급 지휘관, 장교들이 장병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보급품을 횡령, 착복했기 때문이었다. 이 천인공노할 사건은 지휘간부 일부만 처형되었을 뿐 배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52년 국민방위군 아사 사건이 계속 확대되자, 이승만은 이 사건을 비판하는 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윤보선은 '그들이 왜 공산주의자인지 근거를 대시라'며 이를 면전에서 비난하다가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능한 정부 하에서 수많은 무고한 젊은이들이 굶어서 혹은 추위로 죽어 나갔는데도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하는 대통령.

내가 돌보아야 할 국민을 내 손으로 죽여서 흙구덩이에 밀어 넣고도 양심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대통령.

수많은 독립운동가 내지는 민주 운동가들을 서슴없이 저승으로 보내버리는 대통령.


이렇게 많은 잘못 혹은 실수를 저지른 대통령에게

아직도 존경하는 마음이 남아있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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