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로 일을 하러 가는 것은 무리였다. 흔히 프리랜서로 활동하면 일을 스스로 골라서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나를 맞추어야 하는 구조다. 그 조건을 맞출 수 없다면 언제든 다른 통역사로 대체된다. 특히 한영 통번역 시장은 수요만큼이나 공급도 많다. 일이 들어올 때마다 거절하다 보면 자리는 금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열정이 있을 때 불러주는 곳이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비참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클라이언트의 조건에 나를 맞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이를 누구에게 맡기는 일은 늘 불안했고, 결국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은 내가 아이를 직접 돌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일을 포기하는 것과 아이 곁에 있지 못했던 시간을 나중에 후회하는 것 중 나는 후자가 더 두려웠다. 아이의 시간은 앞으로만 흐를 뿐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루 네 시간 반이라는 시간 안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선택과 집중의 문제였다.
아이가 등원하자마자 공부할 것들을 챙겨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다. 당장 해야 할 공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무엇인가에 몰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이 나를 밀어냈다. 영어 공부는 늘 하던 일이어서 습관처럼 이어갔다. 하지만 통번역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처럼 몰입해서 연습하기는 어려웠다. 언제 다시 통역 일을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막연한 대비를 계속하는 공부는 집중하기도, 나를 설득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통역 말고 경제적인 활동이 가능한 다른 능력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이와 지내다 보니 동화책을 읽는 일에는 조금 자신이 있었다. 아나운싱 연습을 하며 쌓인 경험 덕분인지 책방에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 근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곤 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연기하듯 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생각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그렇다면 영어로 아이들을 가르쳐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마침 근처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칠 선생님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1시 전까지. 아이 양육과 일을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던 지금의 나에게는 당장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옵션처럼 보였다.
수업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눈, 코, 입, 귀를 가르치는 날에는 아이들이 웃음이 터지는 포인트를 살려 단어를 말하고, 노래를 부르고, 몸을 움직였다. 매 수업마다 최선을 다했다. 우는 아이 옆에서 바보 같은 장난을 치며 웃게 만들어주고, 내향적인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외향성을 끌어내 아이들 앞에 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아이들은 사랑스러웠다. 그 시간을 통해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이들을 대할 때 무엇이 중요한지 등 결코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는 디테일을 배웠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인정받고 싶었던 나의 능력은 이것과는 다른 지점에 있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결국 어린이집 출강도 계속 이어가지 않게 되었다. 지금의 나에게 더 맞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복잡해질 때 나는 책방과 미술관으로 향한다. 미술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 라그 공간이 좋아서다. 일부러 사람이 적은 시간에 방문해 주목받지 않는 작품들 앞에 오래 서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 작품을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하더라도 그 순간 나에게 도달한 의미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그렇게 작품 앞에 서 있는 동안 나는 누군가의 해석을 따라 그저 흘러가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간으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기분이 든다. 무너진 나를 회복시키고 싶을 때 미술관에 가는 이유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기준에 맞는 해석이 아니라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해석을 선택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책방으로 향한다. 미술관에서 느낀 감정에 어울리는 책을 고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술과 철학 책들이 손에 들어온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집에는 그런 책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내 시선을 오래 붙잡은 분야는 미학이었다.
미학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움에 대해 굳이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아는 존재가 아닌가. 질문은 꼬리를 물었고 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번역서는 특히 더 그랬다. 그렇다고 원서를 읽는다고 이해가 쉬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공부가 궁금해졌다. 당장 써먹을 곳도 없고, 누가 시킨 공부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는 이상하게도 외도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동안의 나는 언제나 목적이 분명한 공부만 해왔다. 경제학과 졸업을 앞두고는 금융기관이나 전공을 살릴 일을 목표로 했고, 그 이후에는 통역사가 되기 위해 통번역대학원 입시를 준비했다. 매번 통역과 번역 앞에서는 클라이언트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왜 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었고 그 설명은 늘 타당했다.
하지만 미학 공부에는 설명할 만한 이유가 없다. 쓸모도, 기한도, 목표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해서 하고 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으며, 심지어 알아주지 않아도 되는 공부를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불안하게 만든다. 나는 이 공부 앞에서 적어도 흘러가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