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붙잡는 공부

들키고 싶은 마음이 데려간 곳, 미학

by 한주연

왜 하필 미학이었을까.
현학적인 학문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남들이 쉽게 선택하지 않는 길, 어렵다고 여겨지는 분야는 언제나 나를 끌어당겼다.


미술관도 그랬다. 미술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유난히 빠르게 흘러갔다. 작품 앞에 서 있는 순간은 나에게 명상과도 같았다. 현실적인 생각들이 하나씩 비워지고, 플라톤이 말했던 이데아의 세계로 잠시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현실이 오히려 덧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감각하는 이 순간이 삶의 본질인 것만 같았다. 이렇게 복잡한 설명이 아니더라도, 미술관의 난해함과 어려움 자체가 나를 끌어당겼다.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을 배우고 이해하며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잘 모르는 작품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보는 일이었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정답과 오답으로 채워져 있다. 인생에는 답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무엇이 더 옳은 선택인지를 판단하고 그 궤도를 벗어날수록 실패라 부른다. 사실 나 역시도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기준은 숨 막히게 느껴진다. 내가 나를 망칠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은 얼마나 두려운가.


예술 작품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나의 해석은 나에게 권위를 주었다.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할 권리, 판단할 권리. 누군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와 다르더라도 상관없다. 내가 만들어낸 의미 역시 그 작품의 일부가 되는 듯한 감각은 이상하리만치 큰 안도감을 주었다. 이것이 내가 확실히 끌리는 지점이었다.


내 관심사는 분명했다. 하지만 이 관심사는 미술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어렵고, 예술경영 역시 아니었다. 전시 매출이나 운영 구조, 인력 계산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전시 정보와 작가 소개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전달하고 있었다. 나는 그 흐름 위에 숟가락을 얹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진짜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 답은 평론에 가까웠다. 작품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 글들. 어린 시절 CD를 사면 들어 있던 북클릿 속 평론가들의 글을 읽는 것이 유난히 즐거웠다. 그들이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누군가의 시선으로 예술을 읽는 경험이 신기했고 재미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가 바라본 것들이 마음속에서만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진솔하게 쓴 무언의 글들이, 언젠가는 조용히 들켰으면 했다. 굳이 '들켰으면'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누군가의 비판, 비난을 우려해 어떤 틀에 휘둘리지 않고 내 소신대로 온전한 내 생각을 담은 글을 썼으면 해서이고, 누군가 봐주기를 바라며 글을 쓰지 않고 싶다는 나의 약간은 비겁하고도 도발적인 다짐이기도 하다.


그 감정들이 나를 철학으로, 예술 철학으로, 그리고 결국 미학으로 이끌었다.

지금 당장 학위를 얻거나 평론가가 되겠다는 목표는 없다. 다만 내가 느끼고 생각해 온 것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정확한 언어로 붙잡고 싶다는 욕심일 뿐이다. 소박하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욕심이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공부는 언제나 목적이 분명했다. 경제학을 전공하며 금융 분야로 나아가고 싶었고, 기자를 꿈꾸며 언론 시험을 준비했다. 이후 통역사가 되기 위해 통번역대학원 입시를 치르고, 합격 이후에는 매 학기 숨이 찰 만큼의 연습을 반복했다. 언제나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었고, 성과로 나를 증명해 왔다.

하지만 지금의 공부에는 정해진 도착지가 없다. 어디까지 가야 충분한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쓸모없는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부는 나의 마음을 붙잡는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붙잡힌다.


내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내 딸이 어떤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지, 그 답이 이 과정 속에 있다고 느낀다. 나는 더 이상 타인이 정의한 정답 위에 나를 올려놓고 살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해석하며 살아가는 인간으로 남고 싶다.


그래서 나는 지금, 미학으로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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