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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연 Jul 17. 2022

반짝거리는 시간

익숙함에 잠식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엄마로서의 삶이 너무 고단하다고 느낄 , 내가 세상태어난   18개월이 지난 아기라고 생각해 본다. 이젠 뱃속에서 머물던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세상에서 보냈으니, 양수로 가득  어두운 자궁보다 이곳이  익숙해졌다. 물속에서 옅게 퍼지는 희미한 소리만 듣다가, 강렬한 음색과 울림까지 느껴지는 저음의 소리는 항상 몸을 일으킨다. 이런 음악을 들으면 그냥 뛰고 싶고, 어제 배운 새로운 점프를 시도해 보고 싶고,  몸을 있는 힘껏 움직일 때마다 연신 사진을 찍는 엄마와 아빠의 웃음소리가 너무 재미있다. 너무 신나서 동그랗게 생긴 물체를 던졌는데, 이건 연신 땅에서 통통하며 튀어 오른다. 우와. 여기  다른, 꽤나 동그랗게 생긴 물체를 던지니 이번엔 아빠, 엄마가 소리를 지른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동그란 물체가 여러 개의 작은 조각과 파편들로 분리됐고, 강한 향기가 나는 물이 바닥에 넓은 모양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 얼른 만져보고 먹어보고 싶은데, 엄마가 달려와서  양손을 잡고 화장실로 끌고 간다.  하필 지금 화장실에 데려가는 거지!  분명히 똑같은 고형의 물체를 던졌는데 어떤  튀어 오르고, 어떤  튀어 오르지 않고 산산조각 나며 원래의 형태가 완전히 분리되니,  그런 걸까? 어떤  던지면 아빠, 엄마가 웃고,  똑같이 어떤  던졌을  아빠, 엄마가 화를 낸다. 대체 무엇이 아빠, 엄마를 화나게 만드는 거지? 똑같이 던진 건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기 눈에는 모든 것이 다 새로울 것이다. 이렇게 가끔 내가 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면 아이의 행동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 어떤 연유에서 아이가 계속 향수를 집어던지고, 약 통을 열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되니 힘든 상황이 생기더라도 그렇게까지 크게 화가 나진 않는다.


오늘 아이가 하루를 보내면서 신기하다고 느낀 순간은 과연 몇 번이나 될까? 이제 이렇게 특별하고 신기한 사건들은 언젠가 아이가 공과 공이 아닌 물체를 구분하고, 공 중에서도 어떤 특성을 가진 공인지, 야구공인지, 축구공인지, 탱탱볼인지 구분하게 되며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사건이 될 것이다. 점차 물체의 특성보다는, 말로 쉽게 정의할 수 없고, 일반화할 수 없으며, 정의하기 힘든 다양한 인간의 속성에 대해, 그리고 삶의 방향에 대해, 크게 놀라고, 좌절하기도 하며, 말로 다 못할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어떤 물성이 지닌 독특한 특성에 대해선 크게 놀라지 않고, 이러한 특성이 주는 자극에 무뎌지는 그런 나이가 되겠지.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에게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분명히,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던 때가 있었다. 내가 얼른 어른이 되어서,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을 꿀 때, 시간은 정말 지독하게 가지 않았고, 계속 멈추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신기한 것도 많았다. 내가 떼어내면 깨끗하게 떨어지지 않는 스티커는 항상 엄마가 떼어내기만 하면 깔끔하게 끈적임 하나 남지 않고 떨어졌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연신 ‘내가 할래’라고 외쳤지만, 항상 내 손만 거치면 꼭 중간 지점에서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지거나, 접착제는 여전히 물건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채 겉 비닐만 떨어지곤 했다. 그것조차 신기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물건 뒤에 가격표나, 성분 표시를 떼어내고 싶을 때 잘 떨어질 스티커인지, 끈적하게 달라붙어서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스티커인지 살짝 긁어만 보면 알 수 있다. 가격표를 깔끔하게 떼어내는 일은 더 이상 내 삶에 있어서 기억할만한 사건이 되지 못한다.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더 고차원적인 고민과, 더 어려운 담론들에 대해 고민하고, 삶에서 더 중요한 결정을 하는 책임감을 짊어지게 됐지만, 달콤한 향의 로션은 막상 혀에 갖다 대니 엄청 쓴맛이 나고, 물에 흠뻑 젖은 모래를 손에 쥐면, 모래들이 손에 들러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히 그런 것일 뿐, 왜 그런지 생각해 봐야 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기억할만한, 기록할만한 사건은 하나 둘 줄었다.


나와 다른 친구, 나를 싫어하는 사람, 나를 좋아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사람 모두 한 때는 꽤 오래 머릿속을 지배하는 연구대상들이었지만, 이제 언제나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내 주변에 공존한다는 것을 안다. 내가 노력해도 누군가는 여전히 나를 싫어할 것이고,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으며, 존재 자체만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도 있다. 사람에 대한 특성도 더 이상 크게 자극을 주는 요소가 되진 못한다. 이상한 사람은 언제나 그랬듯이, 어디에나 있고, 그들도 그랬듯이 이 사람도 이상했고, 좋은 사람은 언제나 그랬듯이, 여기에도 있고, 예전 그들처럼 이 사람도 참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아침에 눈 뜨고, 해 지면 눈 감을 때까지, 크게 기억나고 기록할 만한 사건들이 별로 없다.


불행한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다만 이런 익숙함이 시간을 계속해서 잡아먹고 있다. 기억할 만한 사건이 없는 시간들은 큰 임팩트 없이 유야무야 흘러간다. 떨어지는 비를 보며 연신 신기해하는 아기와는 분명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을 쓰고 있지만, 익숙함에 의해 나의 시간은 댕강댕강 잘려나가고, 상대적으로 훨씬 더 짧은 시간을 쓰고 있다. 이렇게 의미 없이 잘려나가는 시간들을 조금이라도 모아서 붙여보고 싶다. 작은 것에도 반짝거리던 그 시간들은 이제 나의 딸에게 갔지만, 이렇게 배운다. 그 시간을 지켜주고 싶다. 그리고 나도, 내 시간에서 그렇게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늘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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