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네 시간 반으로 사는 법<1>

다른 시간 위에 서게 된 나

by 한주연

아이를 키워내며 주어진 삶을 살아내다 보니, 어느덧 2026년이 되었다. 혼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아기는 이제 스스로 양치를 하고, 원하는 옷을 골라 입는 아이가 되었다. 때로는 엄마인 나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 작은 아기가 자라는 동안 나의 삶 역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간 위에 놓이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많은 것들을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능하다고 믿어왔던 선택들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인생에서 누군가를 위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해 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 현실을 마냥 비참하거나 슬프게만 바라볼 수는 없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내가 낳은 아이를 잘 키워내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소명이라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남아 있었다. 친구를 만나거나 여행을 간다고 해서 쉽게 사라지는 종류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 무렵, 오랜만에 통역 일을 하나 맡게 되었다. 여의도에서 진행되는 회의였고, 회의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아이 등원 준비까지 마친 뒤 9시까지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 근처 역까지 걸어가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10시 15분쯤 도착했고, 회의 시작 전 관계자들을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식사를 할 여유가 없었다. 예전에 여의도에서 근무하던 시절 자주 가던 콘래드 호텔 1층의 10G에 잠시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두고 그날 다루게 될 자료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회의는 11시에 시작해 12시 40분쯤 끝났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다시 지하철을 탔고, 정자역에 도착하니 1시 50분. 헐떡이며 뛰어 아이의 하원 시간에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다. 오랜만에 일을 한 것도, 여의도를 다시 밟은 것도 모두 반가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 좋았는데, 체력적으로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하루였다. 그날 여의도에서 깨달은 것은 내가 예전보다 약해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 삶의 중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루에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대략 네 시간 반 남짓이다. 그 시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어딘가에 다니기 시작하면 예전처럼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를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 선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욕심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해보기로 했고, 마침 기회가 생겨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와 통역에 관한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나의 일을 다른 방식으로 이어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의 양은 줄었고, 방향도 달라졌지만 그 시간들 역시 나에게는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지금의 나는 더 많은 일을 하려 하기보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조금 더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끝까지 놓지 않은 것이 있다면 책, 그리고 공부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공부라기보다는 그저 공부를 하기 위해 공부를 해보고 싶어졌다. 그 결과가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분명한 믿음은 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들이 조금 더 늘어나고, 그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더불어 언젠가 아이가 자라 공부가 어렵고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나 역시 그런 어른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지금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하루 네 시간 반이라는 짧은 시간 위에서 아이와 나를 함께 키워가며 공부를 삶에 남겨두려는 기록을 이 글을 시작으로 조금씩 남겨보려 한다. 이제 나는 예전과는 다른 시간 위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연재는 그 시간 위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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