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과 emergency protocol(1)
말이 씨가 된 것일까? 난 정말로 -미국에서 대학원생으로 살아남기-를 찍고 말았다. 이래서 가수들이 그리고 작가들이 그렇게 노래나 책이름에 집착하나 보다.
때는 바야흐로 11월 30일, 다음날에 있는 미팅을 준비하며 막바지 실험을 하던 나는, 마음이 너무 급했던 나머지 safety glass를 쓰지 않고 헐레벌떡 chemical fume hood에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사용하던 화학물은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지만, corrosive/toxic/flammable 삼연합을 이루는 organic solvent 였다. 늘 아~위험~위험~ 하며 실험 하긴 하지만, 매일 사용하는 솔밴트이기도 하고, 내 나름대로는 후드 안쪽으로 팔을 뻗어서 실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안전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처음으로 쓰는 필터로 솔벤트를 필터링 하고 있었고, 새로 써보는 필터와 주사기인지라, 제대로 사용법을 익히지 못했던 것. 결국, 필터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주사기에 들어있던 0.5ml 정도의 솔밴트가 후드 사방에 튀었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채 떠져 있던 내 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말.. 세상 다시는 겪어보고 싶지 않은 아픔이었다. 눈 안쪽 바깥쪽 할 것 없이 불에 지져지는 것 같았고 알코올 향이 얼굴을 가득 메웠다. 솔직히 이 순간은 지금도 너무 아득하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아팠던 거랑 세상을 덮은 것 같은 알코올 향이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전부이다.
다행히 나는 랩의 safety manager이었고(부끄럽고 다행히도...), 이런 상황에서 취해야 할 emergency protocol은 누구보다도 빠삭하고 촘촘히 알고 있었다. 고통을 인지 하자마자, 나는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을 만큼 매달 검사해 왔던 eye wash station으로 달려가서 맹렬하게 눈을 씻었다. 물에 코가 잠겨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옷과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눈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때 비로소 내손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10분 정도의 눈을 씻은 후,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다행히도 앞이 보였다. 비록 눈물도 줄줄 나고 고통도 여전했지만, 상황이 최악은 아니라는 신호였다. 나는 눈을 필사적으로 깜박거리며, 랩에 잇는 내선 전화로 학교 경찰에 전화를 했다. (혹시 이 글을 보는 대학원생이 있다면, 이런 응급상황에선 외부 경찰이나 병원이 아닌 학교 경찰에 연락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길 바란다. 밖에 연락을 해봤자, 그 사람들은 다시 학교 경찰에 연락을 해야 하니, 학교 내에선 학교 경찰에 직통으로 전화하는 게 가장 빠르고 신속한 대처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사람이 진짜 위급해지면 정신이 차려진다고, 나는 전화 연결을 받은 상담원에게 지금 생각해도 놀라 정도로 침착하게 현재 상황을 전달했다. 나의 장소와 chemical eye injury상태이며 10분 eye wash를 했음과, chemical의 이름, 특징까지. 하지만 정말 어이없게도 상담원은 나에게 재차 화학물의 이름을 물으며, 중간중간 웃기도 하고 스펠링도 불러달라고 했다. 안일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싸우고 있을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타들어가는 눈을 부여잡고 캐미컬을 찾아 간신히 눈을 떠가며 스펠링을 불러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연락을 받고 도착한 EMS (emergency medical services) 은 내가 맨 처음에 말한 특징만 알고 있었고, 캐미컬의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혹시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나처럼 미련하게 스펠링이나 불러주고 있지 말고, 그냥 닥치고 빨리 EMS 팀이나 불러달라고 하는 게 더 유익할 것이다.
전화 이후의 상황은 아래와 같았다. 편의를 위해 시간에 따라 기재해 보겠다.
전화하는 중: 경찰관 도착, 내 눈에 들어간 화학물 확보.
정말 이때 전화에선 뭐라 뭐라 하고, 경찰관은 화학물이 뭔지 물어보고 눈은 타들어 갈 것 같고 정신없었다
전화 5분 후: EMS 선발대(?) 도착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다시 Eye wash station으로 가서 눈을 씻었다. 경찰관이 무슨 말을 했지만, 듣고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잠시 뒤 3명의 EMS 팀이 커다란 가방들을 들고 랩에 도착했고, 오자마자 내 혈압과 맥박수를 쟀다. 그러면서 나에게 상황설명을 부탁했고, 나는 전화로 얘기했던 얘기들을 다시 반복해서 들려주며, 지금까지 눈을 씻었다는 것과, 느끼는 고통의 정도 또한 서술했다.
그 들의 역할은 진짜 EMS 팀이 오기 전까지 SDS (safety data sheet-화학물질을 안전하게 사용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필요한 정보)에 나온 대로 응급처치를 하고 상황을 통제하는 게 역할인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SDS에 나온 방법은 2분 간격으로 물로 눈을 씻으라는 것이었고, 20여 분간 혹사당한 내 눈은, 다시 한번 싱크대로 처박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좀 더 꼼꼼히 씻겨졌다. 나의 경우엔 injury 부위가 명확했고, 내가 이미 정확한 조치를 취했던 뒤라 많은 도움을 받을 순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사고를 당했을 땐 정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너무 고마운 것은, 나를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시켜주셨고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실려는게 보였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2분 washing cycle 중간중간 내가 바닥에 떨어진 물을 걱정하자(랩에는 drain이 없다) 대걸레를 찾아서 주섬주섬 바닥을 닦아주시는 거라든가, 눈을 닦으며 코에 물이 들어가 숨쉬기 어려워하니까 옆에서 시간을 세주며 격려해주는 것이라든가.. 글로 보기엔 사소 할 수 있지만,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내 주의를 환기시켜주었고, 진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 리더가 계속 앰뷸런스가 올 것이며, 바로 병원에 가서 케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등 상황 설명을 해주시기도 하고, 물에 젖어버린 옷을 걱정하며, 감기 걸린다고 옷도 벗어주셨다.
전화 후 20분쯤 뒤: EMS 후발대 도착
그리고 잠시 뒤, 정말 뭐랄까.. 송구스러울 정도로 전문적인 EMS 팀 2명이 도착했다. 119 응급대원 느낌이었는데,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만, '학교에서 이런 팀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일도 있단 말이야?' 싶을 정도였다. 그분들은 이제 제법 통증이 가라앉아 넋 빠진 나를 의자에 앉히고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물어본 뒤, 동공 체크를 하고 시력의 문제 여부를 물어봤다. 다행히 각막은 투명했고, 나는 blurry 한 것 외엔 앞은 보였다. 그리고 그분들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너는 필요한 응급처치를 무사히 잘했고, 이제 병원에 가는 것은 너의 선택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하기 전에 앞서 'Listen carefully'라는 말까지 붙이면서.
물에 빠진 생쥐꼴로 넋 놓은 채 질문에 영혼 없이 대답하며, 엠뷸런스 타고 갈 생각을 하던 나는, 갑자기 정신이 확 드는 것을 느꼈다. 그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엠뷸런스를 타는 비용 (1000-2000불 이상) 응급실에서의 처치 비용(비용 추정 불가)을 지불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EMS 요원 5명과 경찰관 2명 앞에서 엠뷸런스도 보험이 되냐고 물어봤다. 순간적으로 얼빠진 응급대원들의 얼굴이 보였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그들의 결론은 병원에 가는 순간, 그 비용은 자기들이 책임지지 못하며, 개인의 재량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하는 응급대원 후발팀의 표정에서 '이런 것을 물어보다니,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가 보군'이라는 게 느껴졌지만, 가난한 대학원생들은 다 나같이 생각했을걸... 그렇지 않나?
전화 후 40분쯤 뒤: 상황 종료
갑자기 왠지 눈이 괜찮아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나는 그들을 돌려보냈다. 지금 이 상황 이후의 문제들은 내 책임이라는 종이에 사인도 하고. 하지만 내가 어찌 느끼는지와 상관없이, 내 눈은 여전히 상태가 나빠 보였나 보다. EMS 이 선발대 리더가 갑자기 나의 출생지를 물으며, 갑자기 한국말로 자기도 한국인이고, 병원에서 나오는 비용은 학교로 청구가 될 것이니까, 병원에 꼭 가보라는 당부와 함께 이것저것 알려주시고, 타이밍 맞게 도착한 랩 친구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갈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자리를 자리를 뜨셨다.
정말 우연의 일치로 그분이 이 글을 미래 어느 순간 보게 되신다면, 꼭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상황이 그래서 이름도 못 물어봤는데, 덕분에 지금 눈 멀쩡히 뜨고 이 글도 쓰고 있으니까.
전화 후 1시간쯤 뒤: ER 도착
아, 그리고 EMS 리더 분보다 더 늦게 자리를 뜨신 분이 계신다. 바로 처음에 오셨던 경찰관이다. 사실 이런저런 일로 구면이신 분이긴 했는데, 그래서 그랬는진 몰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어느 ER로 가야 될지도 알려주시고, 자기가 라이드 해줄 수 있다고도 해주시고, 랩 친구 2명과 함께 차를 타고 학교를 나가는 그 순간까지, 지켜봐 주셨다. 이분은 자주 보니까 나중에 보면 꼭 감사 인사해야지 싶다.
그래서 랩 친구 두 명과 함께 가까우면서도 제일 사람이 적다는 ER로 향했다. 이때도 다시 통증이 재발해서 기억이 조금 혼미하긴 한데, 옷이 젖어서 너무 추웠고, 친구들이 너무 초긴장/흥분 상태라 내가 오히려 침착하게 조용히 눈물만 흘리며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때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던 것 같다. 최근에 긍정과 생각의 힘에 대한 책을 읽으며 무의식을 훈련한 게 도움이 되었다. 친구들을 안심시키고 기억은 안 나지만 농담도 했던 것 같다.
좀 늦게 알았지만, 알고 보니 내가 EMS 팀을 불렀을 때 교수님한테도 연락이 갔었다고 한다. 깜짝 놀란 교수님께서 랩 매니저인 친구랑 나와 오피스는 같이 쓰는 친구한테 연락을 했고, 덕분에 타이밍 맞게 ER에 갈 수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ER에 도착해서 수속을 마치고, Chemical burn으로 인한 지속적인 안구 손상을 걱정한 간호사들의 배려로 빠르게 입실할 수 있었다.
*랩에서 위급 상황 발생 시 프로토콜:
1. 실험 중지, 즉시 알맞은 조치 취하기
2. 학교 경찰에 연락
3. 학교 경찰/ EMS에 협조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