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과 블랙프라이데이
글을 쓰는 지금은 11월 29일 새벽, 2021년의 블랙프라이데이를 넘어 사이버 먼데이가 왔다. 미국에 있다 보면 아무리 소비를 줄여야지 해도 블프 때만큼은 지갑을 잠구는 것이 너무 어려워진다. 만약 스쿠르지가 영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과연 구두쇠의 대표가 될 수 있었을까? 아마 소비 연합의 대장 정도면 몰라도
나 또한, 작년에 이어 이번년에도 정신없는 할인과 반짝이는 직원들의 미소 앞에 굴복해 버리고 말았다. 아 정말! 신발이랑 운동복만 살려고 했는데... 손에 들려있는 립밤 여섯 개와 브라자 2개는 무엇이란 말인가. 난 사실 쇼핑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립밤만 여섯 개 산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정말 그렇다.
쇼핑은 너무 귀찮고 험난한 일이다. 그것도 내가 돈을 아끼고 싶은 대학원생일 땐 더더욱. 평상시의 나의 쇼핑 과정은 이러하다:
1. 쇼핑의 필요성을 인지. 이것은 주로 극단적인 환경에서 발생하는데, 잘 쓰던 물건이 제발 나를 보내주오 하며 떠나가거나. 아니면 갑자기 너무 거슬리는 나머지 그것이 없다면 일상이 불가능할 것 같고, 세상이 종말 해버릴 것 같은 경우가 예시이다.
2. 끝없는 검색 나름의 합리적인 가격과 성능을 찾는 것.
3. 구매
4. 물건 수령
5. 물건의 필요를 끝없이 고민하며 고통스러워하기
5번이 가장 문제이다. 1번과 4번에 거치는 구매의 서사를 견디고 나서 그 기쁨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니. 이게 얼마나 병든 소비란 말인가. 고민의 고민을 거치고 유튜브와 구글과 네이버를 한꺼번에 켜 두고 비교 분석을 하는 평상시의 소비에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블랙프라이데이는 나에게 고문과 다름없다. 1번과 2번을 건너뛰어 3번부터 시작해버리고 마는 이날엔, 5번이 밀린 이자처럼 더 거세게 들이닥친다. 자제력이라도 멀쩡하면 좋겠는데, 항상 시험과 지나간 일 년에 대한 연민으로 시린 마음은 자제력 또한 앗아가 버린다. 이번 연도에도 이 모든 과정은 변함없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뭔가 반드시 필요한 것 같았던 립밤 여섯 개를 들고 상점을 나오며, 나는 그 즉시 후회했다. 하지만 뭔 고집인지, 환불하러 계산하고 나왔던 그 길을 다시 돌아가기는 싫었다.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같이 간 친구가 알유오케이? 했지만, 예예 암굳 하고 괜한 옹고집에 집에 오자마자 립밤 여섯 개를 입에 다 발라버렸다. 미래에 내가 환불하지 못하게. 하지만 후회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같이 산 브라자에도, 바지에도 목표였던 신발에도 튀었다.
그놈의 옹고집은, 한 번에 떨어지지 않고 한번 더 난리 부르스를 쳤고, 나는 온갖 오물이 튈 걸 알면서도, 그 당일 실험실에 새로 산 하얀 밑창의 신발을 기어이 신고 갔다. 랩 친구가 새 신발을 왜 신고 왔냐고 물었고, 난 어차피 더러워질 건데 뭐 어떠냐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눈이 차마 때지 못한 신발 텍이 미심쩍게 머물렀던 것을 안다.
실험이 끝나고 집에 와서 보니, 신발은 그대로 하앳다. 정신없는 그 와중에도 오물이 튀지 않게 조심해서 실험했던 내가 너무 웃기고 하찮았다. 할인 받아 산 4만 원짜리 신발. 가끔은 내 통장이 가난한 것인지, 그걸 사용하는 내 마음이 가난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최저를 받는 대학원생이지만, 그래도 유기농 계란과 우유를 먹을 만큼, 4만 원짜리 신발은 계절마다 살만큼, 립밤은 쌓아두고 쓸 만큼은 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호기롭게 사고나면, 그럼에도 그 모든 소비가 너무 아쉽고 아깝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게 어렵고, 그럼에도 그것들이 필요하고 사고 싶은 내가 싫다. 나도 이 조급하고 모순된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됐든 내일부터 나는 또 가장 싼 계란을 먹고, 신발은 해질 때까지 신고 립밤은 더 이상 사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 글도 소비를 합리화 하고 싶고, 그럼에도 후회하고 앞으로는 돈을 아껴야지 하고 다짐하는 글이다
아~정말 나지만 꼬이고 불편한 인간이다. 이 글이 왜 대학원이랑 관련있냐고 물어본다면, 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