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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성선설에 대한 제임스 레게의 오해

제임스 레게(James Legge : 1815-1897)는 19세기에 중국에서 활약했던 영국 출신 선교사이다. 그는 유교의 사서삼경을 최초 영역한 것으로 유명하다. 20세기에 보다 나은 영역본들이 나오기까지, 그가 영역한 사서삼경은 서양 학계에서 킹 제임스 바이블과도 같은 지위를 누렸다. 나같이 게으른 학자는 각주가 빼곡한 그의 영역본을 보기만 해도 그만 눈앞이 아득해질 따름이다.


그런데 그는 맹자의 성선설을 오역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고 번역하는 대신, "인간은 선을 향하는 경향성이 있다."라고 번역했다. 다시 말해서 선성은 '선(을 향한 마음의 경향) 성'이 되었다. 인간은 선하지 않다. 다만 인간은 선을 향한 경향성만을 지녔다. 부단한 수양을 통해서 그 경향성을 꾸준히 키워나갈 경우 언젠가는 완전히 선해질 날이 올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은 본성상 아직 "덜 선하다."

하지만 맹자의 성선설은 본성의 '덜 선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그리고 항상 선하다. 인간의 본성은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같아서, 더 이상 선해질 수 없을 정도로 선하며 타락의 여지 또한 전혀 없다. 우리가 맹자의 성선설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맹자의 성선설이 지닌 본의는 저와 같다. 여기에는 어떠한 오해의 여지도 없다.


그렇다면 레게는 어째서 맹자의 성선설을 오역했을까? 필자는 다분히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제임스 레게는 선교사였다. 그리고 그는 유교문화에 익숙한 중국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유교의 성선설과 기독교의 원죄설이 양립 가능하다는 점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맹자의 성선설에서는 원죄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적어도 원죄는 본성을 구성하는 속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레게는 인간은 본성상 선하다고 말하는 대신 선의 가능성을 지닌다고 말했다. 즉 선의 가능성만 지닐 뿐, 완전힌 선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완전히 선하지 않은 그 자리에는 원죄가 똬리를 틀었다. 결국 제임스 레게는 맹자의 성선설을 성유선유악설 또는 성가선가악설로 바꾼 셈이다. 그는 선교 활동이라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학자적 양심을 버렸다.


오늘날 모종삼이나 로저 에임즈는 모두 레게의 번역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했다. 즉 그들은 맹자의 선성을 가능성이나 경향성으로 본다. 이는 모두 맹자의 본의에 어긋난다. 하지만 엄청난 역량을 지닌 선배의 학문이 도그마로 자리 잡은 뒤에 뒷수습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늘날 중화권이나 영미권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와서 대학에 자리 잡는 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모종삼이나 로저 에임즈 또는 그들의 동료나 후학들의 학문적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만 같다. 뭐, 나는 학계를 바로잡는 돈키호테를 자처하지 않는다. 그런 일을 벌이다가 암에 걸려 죽을 일 있냐. 공명심으로 학문하는 사람은 화병에 걸려 오래 학문할 수 없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학문을 즐기고 또 즐기며 이와 같은 공적 사색 장소에서 한두 마디씩 툭툭 털어놓는 것만 해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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