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저께 <맹자의 성선설에 대한 제임스 레게의 오류>에 대해 썼는데, 뜻밖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다. 그래서 그 내용에 대해 조금 더 보충하고 난 뒤, 같은 맥락에서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셰필드(D.Z. Sheffield, 1841-1913)는 우리에게 그다지 잘 알려진 사상가는 아니다. 그러나 제임스 레게보다 26살 젊은 이 미국인은 제임스 레게의 맹자 성선설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한 매우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견해는 1878년 <The Chinese Recorder and Missionary Journal>에 발표한 <A Discussion on the Confucian Doctrine Concerning Man's Nature at Birth>란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주된 주장을 내가 어제 빌렸던 것이니, 학자인 내가 아무 근거 없이 떠든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미국인의 논리는 매우 명쾌하다. 유교의 성선설과 기독교의 원죄설은 양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맹자의 성선설에는 어떠한 악의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를 중국에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유교를 몰아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유교와 기독교를 동시에 들고 가려는 제임스 레게는 틀렸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을 일부러 오역했다. 왜냐하면 유교문화권에 기독교를 전파시키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하지만 맹자의 성선설은 결코 '선의 가능성'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 성선설은 "인간은 선의 가능성이 있다. 인간은 선을 향한 경향성이 있다."가 아니라, "인간은 본성상 선하다."이다.
나는 유교의 성선설에 전통적 의미의 원죄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점에는 충분히 동의한다. 하지만 '원죄'를 무엇이라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유교와 기독교가 서로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유교의 성선설과 기독교의 원죄설을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유교의 성선설을 왜곡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독교의 원죄설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수호를 위해 유교를 몰아낼 필요도 없다. 그러나 혹자는 그것 또한 기독교의 원죄설을 유교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는 것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원죄가 도대체 무엇인지 학자들 간에 전혀 일치된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그 점을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총신대학교의 이상웅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마리아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라는 소논문에서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 개념에 대한 문제점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 내용을 기초로 해서 내용을 써 내려가겠다. 여기서 우선 마리아론과 무염시태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겠다. 먼저 로마가톨릭이 마리아론의 4대 교의라고 부른 주요 교의들을 살펴보자. 물론 4대 교의라는 것은 가톨릭 교회가 직접 정한 것이며, 이상웅이 속한 개신교 개혁주의적 입장과는 다르다. 2006년에 한국 가톨릭 교회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가 펴낸 <올바른 성모신심>에 의하면, 마리아에 관한 주요 교리는 (1) 하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2)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3)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4)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 등 네 가지이다. 이 가운데 무염시태는 (3)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의미한다.
그런데 왜 로마 가톨릭에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강조할까? 바로 예수의 선함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원죄가 아담 이후로 끊임없이 인간의 본성 속에 유전되어 전해진다면, 마리아의 인성에도 원죄가 있을 것이며 그 원죄는 예수에게로 유전될 것이다. '원죄를 지닌 예수'는 곧 가톨릭의 뿌리 전체를 흔들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원죄 유전의 악순환은 어느 지점에선가 그 고리가 끊겨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 못지않게 그의 모친인 마리아를 사랑하니, 마리아 대에서 끊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로마 가톨릭의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직관적으로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마리아도 어머니가 있었을 것이고, 그 어머니는 원죄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왜 하필 마리아 대에서 원죄의 유전이 딱 끊긴단 말인가? 로마 가톨릭은 이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특별히" 마리아에게 은총을 내려서 원죄의 유전을 끊으셨다고 말한다. 아하! 전가의 보도가 나왔다!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치트 키를 쓰면, 이제 해결 못할 일이 없다. 그런데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이왕이면 다른 사람들 원죄도 좀 끊어주지, 왜 특정 사람만 이뻐해서 그 사람의 원죄만 끊어주었을까? 과연 그와 같은 하느님이 진짜 하느님 맞을까?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그런 분 아닌데?
그런데 로마 가톨릭이 휘두른 전가의 보도는 너무도 말이 되지 않았기에, 위대한 신학자들의 반발을 불렀다. 중세의 주요한 신학자들인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대 알베르투스, 보나벤투라, 그리고 로마 가톨릭이 오늘날까지도 “그 신학자”로 존경해 마지않는 토마스 아퀴나스 조차도 이 교의에 대해서 거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무엇보다 구약과 신약 전체 어디에도 하느님이 마리아에게 특별한 은총을 내려 원죄의 유전 고리를 끊었다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 학자들이 제대로 된 대안을 내놓은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원죄를 유전받지 않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방법이 도저히 없는 것이다. 이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원죄' 개념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선한 하느님이 만든 피조물은 오직 선할 뿐이며, 그 본성에 '원죄'가 존재할 수 없다. 원죄는 본성에 적용되는 개념이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맹자의 성선설이 곧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에 가장 어울린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원죄 논란을 만약 맹자가 접했다면, 참으로 어이없어했을 것이다. 맹자에 따르면, 마리아와 예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본성상 선하다. 원죄 따위는 본성 어디에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하느님이 내려주신 본성으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으로 죄를 지었다. 우리는 본성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죄를 짓는다. 그리고 잘못된 생각을 본성으로 바로잡는다. 이것이 맹자의 성선설이다. 누군가 인종차별주의를 후천적으로 교육받아서 진리로 착각하고 산다 해도, 그 인종차별주의가 그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틴 루터 킹은 만인의 본성에 호소해서 인종차별주의를 철폐하고자 했다.
나는 아무리 구약성경 창세기를 읽어보아도, 원죄가 인간 본성으로 유전된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원죄 프레임'은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의 도그마인 것 만 같다. '원죄 프레임'을 지니고 사는 기독교인은 자신의 신심을 재검토해보아야 한다. 생각해 보라. 나는 선한 하느님의 창조물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감히 선한 하느님의 창조물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전능을 의심하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창조물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본다. 누가 더 '이단'에 가까운가? 누가 더 하느님의 완전함과 선함과 전능함을 신실하게 믿는가? 그들은 하느님의 선함에 관심이 많은가, 아니면 사람들의 원죄에 관심이 많은가? 주된 관심사가 원죄인 사람들이 과연 타인을 어떻게 대할까?
아퀴나스, 루터, 칼뱅.... 전부 '원죄 프레임'의 원흉들이다. 나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사랑한다. 하지만 원죄설에는 반대한다. 이것이 내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