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4년 12월 15일 JTBC에서 방영되었던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사토리 세대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다. 비정상회담의 일본 대표 타쿠야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사토리 세대라 한다고 말했는데, 하단에 뜬 자막은 “일본의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원하는 게 없는 젊은이들’을 뜻함.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려는 욕심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그의 말을 부언했다. 타쿠야는 이어서 “사토리 세대는 평범하게 회사 다니면서 욕심이 없고, 창업에 대한 의욕 또한 적은 것 같다.”고 말을 마쳤다.
나는 타쿠야의 말 못지않게 자막의 내용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려는 욕심이 없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인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돈에 너무 얽매인 나머지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려는 욕심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토리 세대의 욕심 없는 성향은 ‘어느 세대나 당연한 정상’이 아닌 ‘특정 세대의 희한한 특징’이 되고 말았다. 저 자막에 따르면, 사토리 세대가 아닌 다른 세대들은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려는 욕심으로 살아간다는 특징을 지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토리 세대의 ‘특징’에 대한 나의 공감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나는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국책은행에 취직해서 몇 년을 다녔다. 그러나 나는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려는 욕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려면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해 추가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하는데, 나는 돈을 버는 것 외에 또 다른 여러 즐거운 일들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버는 데에는 당연히 여타 것들에 대한 희생이 따른다. 나는 씀씀이가 매우 적었기에 현재 나의 봉급이 내 필요를 충족시킨다고 생각했으며, 필요 이상으로 돈에 매달림으로써 삶의 다른 소중한 영역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은 시집가서 잘 살고 있는 여자 입행 동기와 아래와 같은 나누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 당시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OO야, 도대체 너는 얼마를 벌면 만족할래? 얼마를 벌어야 비로소 만족해서 돈 버는 일에만 매달리지 않을 작정이야?”
독실한 기독교도인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눈앞에서 보았더라도 내 질문을 들었을 때보다 더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어이없다는 듯이 “어휴, 너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지, 딱 얼마를 벌면 만족한다는 그런 말이 도대체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하기나 하니?”
그녀가 과연 재림한 예수 그리스도가 동일한 질문을 했을 경우에도 저와 같이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제 생각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부합합니다.’라고 예수에게 대답했을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일찍이 교황이 자신의 저서 <최후의 유혹>을 가톨릭 교회의 금서 목록에 올렸을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을 인용하여 바티칸에 이런 전문을 보냈다고 한다. “성스러운 사제들이여, 여러분은 나를 저주하나 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께서도 나만큼 양심이 깨끗하시기를. 그리고 나만큼 도덕적이고 종교적이시기를 기원합니다.”
나 같은 사람을 어찌 감히 카잔차키스에 비교하겠는가마는, 나는 우리들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으며,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33)”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라는 견해에 동의할 것이라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매우 예의 바르고 좋은 사람이었으며, 나 또한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질문이 명확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령 “10억이라는 액수를 달성하면 만족할 것 같다.” 등의 목표치를 알아내려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하다 보면 우리의 논점을 놓칠 것 같으니, 다시 사토리 세대라는 주제로 돌아가자.
사토리 세대에 대한 나의 흥미는 뜻밖에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아서, 결국 나는 인터넷 등을 통해 사토리 세대에 대한 기사 및 칼럼 등을 찾아 읽고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에게 인용되는 문헌은 2013년 3월 18일 자 아사히신문에 실린 「사토리 세대 침투 중. 자동차 타는 일은 없고, 연애는 담백…(생략). “さとり世代、浸透中 車乗らない、恋愛は淡泊… 若者気質、ネット が造語.”」라는 기사였다. 그 기사가 밝힌 사토리 세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 필요 이상으로 소비를 하지 않는다.
② 명품에 흥미가 없다.
③ 자동차에 흥미가 없다.
④ 술을 마시지 않는다.
⑤ 해외여행에 관심이 적다.
⑥ 연애에 담백하다.
⑦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
상기한 내용을 분석하기에 앞서, 나는 이와 같은 기사를 접한 내 주변의 일부 어른들이 술자리에서 들려주었던 우려를 여기에 옮기고자 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20대의 사토리 세대들이 필요 이상으로 소비를 하지 않게 되면, 총수요가 줄어듦에 따라 일본은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면하기 어렵지. 일본 정부가 수요 촉진을 위해서 양적 완화라는 극약 처방까지 시행하고 있는 마당에, 일본 젊은이들은 소비를 줄이고 있으니 큰일이야.”
나는 항상 그렇듯이 옆자리에서 가만히 경청하고 있었지만, 이와 같은 우려는 그야말로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즉 그 어른들은 은연중에 지금까지 일본 경제-세계경제 또한 마찬가지이지만-는 필요 이상의 소비, 다시 말하면 과소비로 지탱해 온 버블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백하고 말았다. 내가 보기에, 사토리 세대들은 필요 이상으로 소비하지 않는 ‘합리적 소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토리 세대의 합리적 소비패턴을 전 세계가 따른다면, 지나치게 부풀었던 세계경제의 버블이 점차 꺼지면서 세계 경제는 안정적으로 연착륙할 것이 틀림없다. 나는 가짜가 진짜를 차처하고 비정상이 정상임을 뽐내는 세상에서, 비정상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상적인 소비패턴을 포기하고 과소비 패턴을 회복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에 정신이 어질어질하였다.
하지만 이는 단지 어른들만의 착각이 아니다. 나는 나보다 젊은 대학생에게서도 이와 관련된 멋진 말을 들었다. 굳이 스마트폰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폴더 폰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나는 대학 강의를 맡게 되자 스마트폰을 사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다. 단톡 방을 개설하면, 수업 공지를 할 때 여러 모로 편리한 점들이 많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몇 년 만에 쭈뼛쭈뼛 휴대폰 매장에 들어선 뒤 외국인처럼 어쩔 줄 몰라하던 내게, 착하게 생긴 어린 점원이 다가와 이것저것 권하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꺼냈다.
“모든 휴대폰들은 사실상 수명이 3년밖에 되지 않죠. 다시 말해서 3년이 지나면 망가질 정도의 내구성만 지니 죠. 그리고 저는 거기에 찬성해요. 왜냐하면 그래야 휴대폰을 계속 많이 팔아먹을 수 있고,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살아남고, 그에 따라 저희들 또한 먹고살 것 아닙니까.”
나는 모든 휴대폰의 수명이 정말 3년에 불과한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참말이라 믿을 생각 또한 없다. 하지만 나는 사회적 약자라 불리는 비정규직 노동자, 저와 같이 선하게 생긴 어린 학생조차도 이와 같이 버블 경제학의 노예가 되어서 저와 같은 소리를 스스럼없이 한다는 데에 연민을 느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폭탄 돌리기 식 경제의 버블이 터지는 순간,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핸드폰 매장 직원 등의 서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최근 각국의 경제위기사태를 보았을 때 자명한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 또한 정부의 소비 진작 노력에도 꿈쩍 않는 안분지족(安分知足) 형 사토리 세대의 소비풍토를 밉살스레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나는 참을성 있게 이 글을 읽어주는 고마운 독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보다, 내가 하던 얘기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