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가 가즈키, <노자의 변명-도덕경에 숨겨진 성(性)의 암호코드>
요즘 노자의 <도덕경>에 관련된 글을 쓰면서, 다양한 문헌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치가 가즈키의 <노자의 변명>(말글빛냄)과 소병의 <노자와 성>(문학동네)가 눈에 띕니다. 두 서적 모두 <도덕경>을 성(性)의 차원에에서 해석한 책인데요. 후자의 경우는 난이도가 꽤 있는 전문서적인 반면에, 전자의 경우는 중국 소수민족 마을로 여행을 떠난 젊은 일본 여성이 <도덕경>에 따라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 뒤, 그 경험을 글로 옮긴 것입니다. 무언가 자극적인 것을 원하시는 분이라면, 아쉽게도 두 책 어디에서도 만족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에너지는 실상 우주의 생명에너지이며, 성에너지에 따라 사는 삶은 단순한 성행위를 넘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이라는 이 책의 결론이 마음에 든다면, 이미 절판된 <노자의 변명>을 도서관에서 찾아서 읽으셔도 충분히 기쁨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평소에 중국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던 주인공 가즈키는 중국 운남성 시골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을 따라, 무릉도원과 다를 바 없는 한 마을에 도착합니다. 고대의 중국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듯한 그 마을 사람들은 너무도 온화한 표정과 자연스러운 몸가짐을 지니고 있었으며, 항상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마을에 머문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노인은 가즈키의 손을 이끌고 신당에 올라, <도덕경>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도와 덕은 각각 남성 생식기와 여성 생식기를 뜻합니다. 한편 <도덕경>은 우주 전체에 가득 찬 생명에너지를 성이라고 정의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협소하게 정의한 성이 결코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성욕을 충족한다고 하지만, 이 노인에 따르면 우주 에너지에 따라 사는 모든 삶이 소중하며, 현대인이 말하는 성행위는 그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와 하나 되어 사는 데에서 오는 지극한 만족감(<도덕경> 본문에서는 "황홀"이라고 표현합니다.)입니다. 내가 우주와 하나이며 소우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먹고 자고 일하고 사랑을 나누는 그 모든 순간에 우주와 함께 할 때에만, 나는 사랑을 나눌 때에도 현대인들이 느끼지 못하는 거대한 충족감과 충만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저는 <도덕경>을 성(性)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집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노인의 기본적인 이해에는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빌려서, 저 노인의 견해를 보충해보겠습니다. 우선 저는 오늘날 성행위를 지칭하는 영어식 표현 2가지에서 논의를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make love이며 둘째는 have sexual intercourse with입니다. 전자는 감정(love)에 대해서 논하고, 후자는 행위(have sex)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이 구분은 뜻밖에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두 사람의 모든 행위는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 안에서 행해져야 하는데, 오늘날에는 사랑 없는 성행위만으로도 진정 무한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잘못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감정, 즉 사랑이 빠져 있습니다. 오직 intercourse라는 생식기 간의 마찰만이 강조되지요. 이처럼 감정 대신 행위만이 강조됨에 따라서, 오늘날에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우주 에너지를 공유하는 소중한 장이 스포츠 게임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남성우월주의자들은 심지어 get laid(침대에 눕히다)라는 표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영미권 드라마나 영화에 매우 자주 나오는 표현이지요. 사랑이 빠진 행위를 말하는 데다가, 남성이 여성을 침대에 눕힌다는 식의 아주 좋지 못한 표현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영미권의 make love는 한국어로는 "사랑 나누기"에 해당합니다. 반면에 have sex는 그냥 "섹스하다"로 옮겨지죠. 과거 소설에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라는 표현이 적지 않게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와 같이 "애매모호하고 덜 자극적이게" 표현해서는 안 되겠지요. get laid와 마찬가지로 "자빠뜨리다"라는 표현까지 난무하니까요. 오늘날에는 감정보다는 행위를 중시하는 철학이 대유행입니다. 잘못된 언어 표현은 잘못된 시대정신을 반영합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 무엇을 하든 행복하고 만족스럽습니다. 식사하는 행위, 영화 보는 행위, 여행하는 행위, 사랑하는 행위... 그 모든 행위들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지요. 하지만 사랑이 빠진 행위는 끔찍하고 힘이 들기만 합니다. 오죽하면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하겠습니까!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부부 사이에도 강간이나 다름없지요.
한편 스피노자의 반목적주의와 관련해서, 존재론적 섹스와 목적론적 섹스를 구분하고자 합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모든 존재자는 신적이며, 존재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힌두교에서도 이와 같은 철학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든 남성은 남신이며, 여성은 여신이지요. 남성과 여성이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신과 신, 소우주와 소우주 간의 합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과격한 동작을 취하거나 조급한 쾌락을 갈구하는 대신, "나와 너의 완전한 존재" 그 자체를 즐깁니다. 요즘 슬로 섹스(slow sex)가 이와 같은 철학을 제법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진정 사랑하는 남성과 여성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심지어 sexual intercourse를 가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가장 사랑하는 상대방의 "존재"를 느긋하게 즐기지요. 그와 같은 사랑 나누기는 몇 시간 동안 지속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남성이 무슨 "변강쇠"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연인들, 남신과 여신은 서로의 신성과 완전한 존재를 끊임없이 즐길 따름이지요. 굳이 사정을 하지 않아도,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행복감은 점차 증강합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따른 목적론적 섹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노자의 변명>을 쓴 치가 가즈키는 "사정중심주의"라고 표현하는데 아주 적절합니다. 남성의 입장에서, 오직 사정만을 "목적(telos)"으로 하고서 성행위에 임하는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 현대 남성들은 섹스의 목적이 그거 아니면 무엇에 있느냐며 충격받을 것입니다.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자의 경우, 이제 그는 파트너와 "사랑을 나눌"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충분히 즐기고 두 사람 모두 즐거워야 하는데, 본인의 사정 욕구만을 충족시키기에 바쁩니다. 상대방에 대한 성적 배려는 온데간데없고, 성행위는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순식간에 끝납니다. 결국 잠자리에 든 두 사람 모두 우주 에너지를 느끼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서, 불만족스럽게 일을 치릅니다. 진정 상대방의 존재를 즐기는 것이 사랑 나누기라면, 내 몸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도 사랑 나누기에 들어가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 남성들은 잘못된 식습관과 운동부족으로 인해 금세 성적인 무능력 문제를 겪게 됩니다. 입으로는 변강쇠를 자처하지만, 실제 사랑을 나누는 횟수는 형편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나누기가 육체적 스포츠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와이프가 샤워하는 소리가 들리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자는 척하기 바쁩니다. "장모님 딸에게 그러는 것 아니다.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냐."라며 애써 변명합니다. 비싸지만 의미 없는 자양강장제를 잔뜩 사 먹고 심지어 비싼 알약도 구입해서 먹지만, 그래도 예전만 못합니다. 사랑 나누기가 무엇인지, 두 사람이 정말로 하나 되어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나이 들어서도 잠자리를 가진다는 것이 주책맞아 보입니다. 이 때문에 노인들의 성생활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의 등장인물들은 마냥 주책맞은 노인네 들일 따름입니다. 젊을 때에는 픽업아티스트를 자처하며, 클럽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니다. 사랑이 없어도 행위는 가능하기에, 여성을 완전한 존재로 보는 대신 사냥감으로 간주합니다. 사람을 낚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영웅시되곤 하지요. 이 모든 비정상적 사태들은 올바른 철학의 부재에서 비롯됩니다.
이 때문에, 존재론적 철학과 목적론적 철학의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삶의 모든 영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적어도 대학에서는 이와 같은 방식의 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