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앤 미니멀 라이프스타일 제안
8월 8일 홍콩 출국 전까지 저는 가급적이면 많이 걷고 싶었습니다. 비자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아서 홍콩 출국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저는 제 힘으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8월 8일 저녁 8시 15분 출국 예정이라고 비자 신청서에 표기했으므로, 8월 8일 이전에 비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사실상 비자 발급 거부인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자 발급이 거부되었을 경우 저의 홍콩 근무는 무산되게 되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으로 인해 제게 주어진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홍콩 근무가 무산된다면, 9월 초 대학 강의가 시작되기 전까지 도보로 국토 종주 및 제주도 종주를 나설 계획이었습니다. 자전거를 사서 타고 내려갈 수도 있고요. 여하튼 국토 종주 계획은 이제 2022년으로 미뤄졌습니다.
6월 30일 새벽에 속초 여행을 떠나면서 저는 해파랑길 41코스에서 45코스까지를 쭉 따라서 걷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실 몸 컨디션이 온전한 상태에서 마음을 먹으면 1박 2일에 끝낼 수 있는 코스였습니다만, 가급적 천천히 걸으면서 국토를 하나하나 제 발로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마들역에서 5시 35분 첫 열차를 타고 동서울 버스터미널로 향했습니다. 속초발 티켓을 사서 손에 쥐고 터미널 안을 서성이다 냉큼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10시 내외로 도착할 예정이었으므로 버스 안에서 잠을 청할까 했으나, 마음을 고쳐 먹고 잭 케루악의 <다르마 행려 The Dharma Bums>를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예전 글에서 잭 케루악을 위시한 비트 제네레이션 세대 시인을 계승한 노마드들이 코로나 시국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잭 케루악의 저서를 자유자재로 암기하여 읊는 남녀노소가 이제는 또다시 <길 위에서 On the Road>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집과 직장을 잃은 미국인들이 자동차에서 먹고 자며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잘못되지 않았으며 본인들이 패배자가 아니라는 점을 문학과 철학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잭 케루악을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케 만든 베스트셀러인 <길 위에서>는 발간 당시 미국 젊은이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며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는 또 다른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다르마 행려>를 펴냅니다. 이제 성공한 작가인 케루악의 목소리는 한층 차분해졌으며, 그는 모험과 섹스에 미친 젊은이라기보다는 좀 더 깊은 곳을 불교적 시각에서 들여다보려는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젠장, 저는 이 날에도 16:8 간헐적 단식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습니다만, <다르마 행려>에서 두 주인공이 "허쉬 초코바"를 맛나게 먹는 장면에서 그만 반항하지 못하고 가나 초코바를 꺼내어 먹고 말았습니다.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게 마련이지요. 다르마 행려가 초코바를 먹는 장면을 읽으면서 함께 초코바를 먹지 않는다면, 그만큼 책 읽는 맛이 떨어지겠지요. 홍콩에 와서 보니, 제가 왜 <다르마 행려>를 가지고 오지 않았는지 후회스러울 따름입니다.
속초 시외버스터미널은 생각보다 규모가 매우 작았습니다. 저는 "속초 카페 거리"에 있는 "바다 정원"이라는 곳에서 오후를 보내다가 <쉼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하기로 했습니다. 카카오맵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사실 "속초 카페 거리"가 아니라 "고성 카페 거리"입니다. 고성군에 소재하고 있거든요. 거리는 2.9km. 도보 이동에 전혀 문제없는 거리입니다.
속초등대전망대와 영금정전망대에 면한 바닷길을 지나쳐 장사항바다숲공원을 따라 걷습니다. 아침부터 바닷가를 걸으니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속초시에서 고성군으로 넘어가는 언덕길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오른편으로 꺾어서 까리따스 마태오요양원을 왼편으로 끼고돌아 내려가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다정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국에서 이보다 더 큰 단일 규모의 카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더군요. 10시 오픈에 맞추어 입장하니, 고객이 거의 없었습니다. 덕분에 제 마음껏 카페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날씨는 다소 흐렸습니다만, 이럴 때야말로 피부가 탈 걱정 없이 마음껏 걷기에 좋지요. 가족 단위로 놀러 와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꼬맹이들을 풀어놓고 망중한을 즐기는 부모가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어깨 대신 대머리 양편에서 날개가 솟아올랐습니다. 셀카봉이 없으니, 이럴 때에 제대로 된 사진을 남기지 못하는군요. 인상은 왜 이렇게 쓰고 있는지. 포토존 아래에 다음 타자들이 대기 중이니, 황급히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제 목표는 옥상정원 루프탑에 올라가 빵과 함께 <다르마 행려>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평소라면 쿠션 의자에 앉기가 어렵지만,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명당을 사수할 수 있었습니다.
<다르마 행려> 속에 담긴 치열한 고민은 사실 이 날의 저와는 별 관계가 없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편안한 자세로 여유롭게 독서에 열중했으니까요. 다만 1시간가량 앉아 있자니 옆 자리에 대학생 2명이 앉아서 주식과 부동산 이야기를 시끄럽게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의 대화 주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아무래도 제 독서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바닷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날의 멋진 뷰를 비루한 제 스마트폰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군요. 저 외에도 소나무 숲 테라스에는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각자의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연인들, 어린아이를 품고 온 젊은 부부, 노년을 즐기는 백발의 어르신 등이 모래사장을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도 책을 읽다가 파도 소리에 홀려 몇 번씩이나 의자에서 일어나 바다 근처까지 걸어 나가곤 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저녁 해가 질 때까지 이렇게 앉아 있고 싶었습니다만, 놀랍게도 아침 바닷바람이 꽤나 차가웠습니다. 결국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후 2시쯤 저는 철수를 결심했습니다. 속초 수산물 시장까지 걸어가서 <속초문어국밥>에 방문하려 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 날은 휴업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별 수 없이 저의 올타임 초이스인 순대국밥을 먹으러 가기로 합니다.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집니다. <원조 동해순대국>에 우산을 탈탈 털며 입장했습니다. 늦은 점심때 낮술을 즐기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속초 순대국밥은 듣던 대로 간이 "심심합니다." 저는 맑은 국물이 색달라서 맛있게 먹었습니다만, 서울에서 접할 수 있는 진한 국물을 기대하신 분들은 살짝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배낭여행객들에게 평이 좋은 <쉼 게스트하우스>에서 오늘 묵기로 합니다.
이곳은 뭐랄까요, 입구에서부터 멋있습니다.
침대를 배정받고 난 뒤, 속초의 명물인 <동아서점> 등을 방문해서 서점 분위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동아서점>의 운영자인 김영건 씨는 할아버지 때부터 운영되다가 폐업 위기에 처한 서점을 물려받아 어렵사리 살려냈습니다. 그는 현재 속초 문화를 소개하는 알림이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며, <동아서점>과 관련된 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659005
속초는 최근 몇 년 동안 "책의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북스테이" 게스트하우스도 생겨났지요. 속초에 와서 며칠 동안 조용히 책만 읽다 가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솔직히 속초 시내를 이렇게 걸어 다녀 본 적은 처음이었는데, 왜 이 아름다운 도시에 내려와 독서를 만끽하고 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너무나 아끼는 후배, 태국 여행을 두 번씩이나 함께 갔던 후배의 고향이 속초라서 그런지 이 도시가 더욱 좋았습니다.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808271413001
속초 도심 여행의 필수 코스인 <칠성 조선소>도 찍고 갔습니다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조선소 카페 입구에 자리한, 자그마한 할머니께서 운영하시는 가맥 집인 <누네띠네>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다음번 속초 여행 때에는 반드시 여기서 맥주와 해산물을 즐길 것입니다.
수입맥주를 사서 <쉼 게스트하우스> 루프탑에 올라가니, 도저히 잊기 힘든 멋진 야경이 저를 맞이했습니다.
배낭여행객들이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이유는 다양한 여행 친구들을 사귀기 위함이겠지요. 저는 여기에서 2명의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한 명은 저와 동갑이며 페디큐어 가게를 운영 중인 텁수룩한 사내였습니다. 또 다른 한 명은 한의대를 다니는 20대 중반의 근육남이었는데, 우락부락한 몸매와는 달리 매우 섬세한 감성을 지닌 멋진 이었습니다. 속초에서 유명한 닭강정을 안주 삼아,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전동킥보드를 타고 강릉에서 여기까지 여행 온 동갑내기 친구는 저와는 다른 세상에서 색다른 경험을 잔뜩 지니고 있었습니다. 살아오면서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 같았지요. 한의대 친구는 대학을 늦게 입학했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게스트하우스에 묵어 본다고 했습니다.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 함께 술을 마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이와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된 데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루프탑에는 총 3팀이 자리해서 각자의 시간을 즐겼는데요. 리셉션 데스크에서 저를 정답게 맞아주던 직원들이 몽땅 올라와서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아주 좋았습니다. 코로나 시국이 아니었다면 루프탑에서 영화를 상영하거나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었을 터입니다. 하지만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양양으로 걸어갈 예정이라서 자정 전에 술자리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는 다시 만나서 회포를 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홍콩에 와 있고, 이들과 단톡방을 통해 연락을 하지만 다시 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