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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홍콩 몽콕의 WOFT에서 맥주 마시기

일요일 같은 토요일 보내기 (1)

2021년 9월 25일은 토요일입니다. 홍콩에서는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 토요일에 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서 하늘을 보니, 꾸물꾸물합니다. 아무래도 한바탕 비가 쏟아질 듯합니다. 이래서야 어딘가 멀리 여행을 떠나는 일은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서 작전을 바꾸어 이번 주는 토요일까지 일하고 내일인 일요일에 놀기로 합니다. 보통 지하철 첫 차를 타고 움직이지만, 주말에는 밀린 큰 빨래들을 하느라고 다소 늦게 출근합니다. 출근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연구원이기 때문에 매일 결재받아야 할 문건에 쫓기고 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그래서 쉬엄쉬엄 일하면서 음악도 듣고 뉴스도 청취하고 합니다. 역시 토요일에 일하기란 쉽지 않네요. 목이 말라서 밀크 티를 사러 나서니, 이럴 수가, 눈이 시릴 정도로 하늘이 파랗습니다. 결정되었습니다. 학교에 나왔으니 당장 퇴근하기는 그렇고, 4시쯤 사무실을 나서서 술 마시러 가기로 합니다. 왜 하필 4시냐? 홍콩의 펍(pub)들은 대부분 낮 시간 동안 해피 아워라고 해서 많게는 40~50%까지 술값을 할인해줍니다. 쬐그만 맥주 한 잔에도 서비스 차지를 포함하여 1만원이 넘기 때문에, 아무래도 해피 아워를 이용하는 편이 낫지요. 그런데 충분히 짐작이 되는 일이지만, 술집마다 해피아워 시간이 다릅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4시 경에는 절대 다수의 가게가 해피 아워 중인 것을 지난 번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4시에 사무실을 나서서 4시 반쯤 마음에 드는 가게에 입장하기로 합니다.  


본디 오늘 방문하고자 하는 펍을 정해놓았었습니다. 퇴근길에 있는 "홍콩의 홍대입구"인 몽콕 역에는 다양한 펍들이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트라팔가 펍>을 방문했는데, 오늘은 <매드하우스>를 들를 예정입니다. 그러고 보니 매드하우스는 2021년 9월 현재, 가게 오픈 시간에서부터 저녁 8시까지 해피 아워입니다. 해피 아워라도 서비스 차지를 포함하면 제일 저렴한 맥주 한 잔이 8천 원 정도 합니다. 물론 모두 수제맥주 집이기 때문에, 한국 이태원의 <맥파이>나 <더 부스>의 가격을 생각하셔야지, 동네 치킨 집의 생맥 500ml 가격을 떠올리시면 안 됩니다. 여하튼 콧노래를 부르며 <매드하우스> 근처까지 가서 아무 생각 없이 호주머니에 두 손을 꽂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아뿔싸, 호텔 방에 신용카드와 현금을 놓아두고 나왔습니다. 가진 것은 홍콩 옥토퍼스 카드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번 <트라팔가 펍>을 방문했을 때, 주인장이 옥토퍼스 카드를 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때에는 현금과 신용카드가 있어서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릅니다. 할 수 없이 일단 <매드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토요일 낮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가게 내의 바이브가 좋습니다. 젊은 매니저가 신나게 뛰어옵니다. 식사를 할 것인지, 술을 할 것인지 물어봅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옥토퍼스 카드 받습니까?" 매니저는 세상에서 가장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No~"라고 대답합니다. 옥토퍼스 카드는 낮술 마시는 사나이가 IPA를 결제할 때 사용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저는 풀이 죽어 돌아섭니다. 햇살은 어찌나 또 센지. 오늘은 이대로 귀가해서 호텔에 가 현금과 신용카드를 챙긴 뒤에 침사추이 쪽으로 가서 마셔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제 퇴근길은 "홍콩시티대학->몽콕 역-> 조던 역-> 숙소 -> 침사추이 역" 이렇게 이어지거든요. 뭐, 널린 게 술집이니까요, 라고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포도를 따먹지 못한 여우마냥 끙끙거립니다. 그런데 맥주 가게가 죽 늘어선 골목을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아니 이게 웬 일입니까, 옥토퍼스 카드 환영! 이라고 써붙인 크래프트 펍이 눈앞에 떡!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가게 안 분위기도 매우 마음에 듭니다. 당연히 해피 아워 중이고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가게 안으로 쑥 들어갑니다.


펍 이름은 워프트(woft)입니다. 한국 블로그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은 아닙니다. 하지만 규모나 분위기가 <매드 하우스>보다 낫습니다. 현지인들도 제법 앉아 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식사? 술 only? 라고 물어봅니다. 왜냐하면 테이블이 다르기 때문이죠. 저는 술만 마시고 가겠다며, 구차하게 또 옥토퍼스 카드 받아주냐고 물어봅니다. Yes! 라는 대답이 빙그레 웃음과 함께 돌아옵니다.

이렇게 뭔가 주렁주렁 걸어놓은 인테리어가 꽤나 마음에 듭니다. 신경을 많인 쓴 티가 납니다. 메뉴판을 받아들고 술들을 찬찬히 살펴 봅니다. 아, 그전에~

가게마다 해피 아워의 성격이 다릅니다. 이 펍의 경우, 해피 아워 동안 첫 번째 잔은 할인이 되지 않고 두 번째 잔부터 50% 할인입니다. 저는 두 잔까지 마실 생각은 없었습니다. 술을 한국처럼 퍼마시려면, 고급 슈퍼에 가서 IPA를 사서 숙소에서 먹는 편이 낫습니다. 홍콩에서 흥을 내며 술을 마셨다간, 별로 마시지도 못했으면서 다음 날이 슬퍼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참으로 좋은 나라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여하튼 해피 아워 혜택을 받지 못할 상황이라, 일단 홍콩에서만 마실 수 있는 술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 레스토랑의 타이틀이 붙은 맥주를 골라 주문합니다.

<WOFT PALE ALE>이지요? 일단 병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홍콩에 와서 보니, 대단히 중국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서양식인, 뭔가 저의 비루한 표현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그루브가 병딱지에 많이 느껴집니다.

사진에 찍힌 시간을 보니, 마시기 시작했을 때가 오후 5시로군요. 첫맛이 쌉싸름한게 딱 좋습니다. 뭔가 개성이 강하지는 않지만,  절대 저를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제가 홍콩 펍을 딱 세 군데밖에 안 가보았지만, 희한하게도 전부 90년대~2천년 대 초반 팝 음악을 틀어주더군요. 저같은 40대 아재 "갬성"을 제대로 자극하는 분위기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에서는 요즘 주점 백그라운드 음악으로 저 시대 팝을 틀지는 않지요. 이태원에는 제법 있었습니다만, 코로나 시국 때 방문해 본 기억이 없습니다. 여하틀 페일 에일을 홀짝홀짝 마시면서 90년대 팝을 듣고 있자니, 또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헤벌레 앉아 있습니다.

눈에 "화천주지"라는 네 글자가 떡하니 들어옵니다. 한자는 다르지만 한국에서 하도 "화천대유"가 인구에 회자되다 보니, 화천이라는 발음만 들어도 헛웃음이 나옵니다. 저같이 촛불 들고 광화문 광장에 나가서 현직 대통령 끌어내린 시민에게, 대장동 게이트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구린내가 진동하는 사건이니까요. 여야 유력 정치인과 법조인들의 이름이 모조리 거론되는 대형 게이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2020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여비서 성희롱 이슈가 터졌을 때, 주류 여성시민단체와 여성가족부가 입장 발표하지 않고 입을 꾹꾹 다물었던 황당한 장면이 기억납니다. 이른바 내로남불 진영논리의 궁극을 보여주었는데요. 이번 대장동 게이트에도 수사 촉구 등의 입장을 발표하는 주요 시민단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네요. 국민의 혈세를 지원받으면서도 투명한 회계감사를 거부하곤 하는 주요 시민단체야말로 이럴 때 발벗고 나서야 할텐데요. 진영논리에 따라 내로남불을 시전하는 시민단체들의 무거운 엉덩이만 보아도 어느 쪽이 더 구린내를 풍기며 타격을 입을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이야기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인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진보의 미래>라는 책을 다 완성하지 못하시고 운명을 달리 하셨는데, 2021년 대한민국 진보의 미래가 참으로 염려되는 오늘입니다. 한 줌에 불과한 유튜브 정치 자영업자들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특정 후보에게 죄다 줄을 선 상황에서, 진보 진영 전체가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세계 진보정치진영 가운데 대한민국에만 특이한, 매우 주목할 만한현상입니다. 여타 국가의 진보 진영에서는 정치 유튜버들의 영향력이 이렇게까지 거대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쉴새없이 음모론을 생산하며 매번 선거판에 영향을 미친다? 여당 정치인들이 선거 때면 앞다퉈 출근도장을 찍으며 일개 유튜버 앞에 무릎을 붙이고 조아리고 앉아 말씀을 듣는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가능한 일이고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회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당 국회의원 전부를 합쳐도 그 영향력이 진보 유튜브 정치 자영업자 단 한 명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헌법에 보장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개개인의 주체적 사고가 가능할 때에만 유의미합니다. 누군가가 진영논리에 찌들어 자율적 정치 판단을 보류하고 자신의 뇌를 유튜브 정치 자영업자들에게 맡긴다면, 그는 사실상 '정치적 주체'임을 스스로 포기하고 개돼지를 자처하는 셈입니다. 내가 어느 후보를 지지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의 지지 후보 결정이 진영 논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과정이었는지의 여부가 여기 한 명의 시민으로 존재하는 내게 중요한 사항입니다. 절대 다수의 시민들은 잘못을 알아챌 수 있는 이성과 양심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편의 잘못에만 스스로 눈을 감아 버리는 내로남불이겠지요. 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장안의 화제였지만, 현직 대학교수와 고위 공직자들의 자녀 챙기기 행태에 비춰볼 때 오히려 "순한 맛"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온 국민들에게 허탈감을 주었지요. 아무쪼록 영화 <아수라> 속 안남시와 박성배 시장 케이스가 현실 정치의 "순한 맛"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원칙 없는 승리보다는 원칙 있는 패배가 낫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지속가능한 정치를 위해서는 "이기고 지는 결과"보다 "정당한 원칙"이 중요하다는 점을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사이비 진보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연명할 수 있는 것 또한 노무현 대통령께서 남긴 정치적 유산 덕분인데, 그들은 현재 그 유산을 믿기 어려운 속도로 탕진하고 있습니다. "대선 경쟁력" 운운하며 정치적 원칙을 도외시하는 세력들은 장차 자신이 속한 진영 전체를 타락시키고 위험에 빠뜨릴 것입니다. 진보의 탈을 쓴 마키아벨리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전쟁터에서 매운 화약 냄새가 잠시나마 가라앉을 때는, 결국 상대방의 실책으로 엉겁결에 얻었던 권세를 진보 진영이 반납하고 나서 유튜브 정치 자영업자들이 새 판을 짜기 시작할 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진보 진영에 기생하는 암세포들인 일부 유튜브 정치 자영업자들이, 국민이 손수 뽑은 여당 국회의원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여당 지지층을 직접적으로 좌지우지하는 상황 자체가 비정상적입니다. 그들 중 주요 인물들이 음모론에 능하고 자기 말에 책임 지지 않으며, 진보층을 타락시키고 중도층의 혐오를 사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됩니다.  "노무현은 사람이 너무 물렀다"고 말하며 권력 쟁취를 위한 강경 일변도를 주장하는 세력들은, 바로 그 "원칙을 고수한 대화와 토론"의 노무현 정신 덕분에 그나마 아직까지 정치판에 본인들이 빌붙어 살 수 있다는 진실을 외면하는 배은망덕한 자들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슬프지만 사실입니다. 순자나 한비자, 마키아벨리 정치철학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이 바로 세상을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사회진화론 판으로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노나라의 세력가인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을 때, 성인께서는 "정치라는 것은 정당한 원칙이다政者, 正也"라고 대답하셨지요. "정치는 이기고 지는 싸움 이전에 정당한 원칙의 싸움"이라는 진리를 곱씹고 또 곱씹어 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종업원이 제게 다가옵니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입니다. 45분에 해피 아워가 마감되니, 그 전에 추가 오더를 하시겠느냐는 질문입니다. 고맙지만 결제하고 일어서겠다고 답합니다. 확실히 저는 다양한 술보다 다양한 펍을 즐기는 성격인 모양입니다. 2차로 다른 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요.

악, 내 눈! 사진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보시다시피 HKD 69에 10% 서비스 차지가 붙어서 총  HKD 76입니다. 1 홍콩달러는 150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350ml 1병 마시는 데에 1만원이 넘게 들었지요?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홍콩의 물가를 알려드리기 위해 영수증을 첨부했습니다. 저는 이 펍의 분위기가 너무도 맘에 들어, 재방문 의사가 있습니다.


엄청난 습도의 후텁지근한 홍콩 날씨는 고맙게도 맥주 한 병에 저를 취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항상 바쁘게 들떠 있던 생각들을 내려놓고, 오늘은 천하태평하게 어슬렁어슬렁 몽콕 역 주변을 산책합니다. 다양한 음식들과 가게가 눈에 들어옵니다만, 홍콩 도심 풍경은 어찌 보면 비슷비슷한 것만 같습니다. 장국영의 단골 가게였던 미도 카페를 지나서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으로 접어듭니다. 현지인들이 쳐다볼 정도로 느릿느릿 걸어가다 보니, 예전에 놓쳤던 여러 풍경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외모의 삐끼들이 문 앞에 서 있는 "유흥 업소"가 꽤나 많이 있습니다. 보란 듯이 성인 잡지나 나체 사진을 진열해 놓고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가게들도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불법인 듯 몰래 하지만) 직업여성들의 호객 행위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정말 살벌합니다. 현장에 익숙지 않은 현지인은 물론이요 저와 같은 외지인은 정말 눈길조차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제가 백팩을 멘 관광객 차림이 아니라 면 쪼가리에 반바지를 걸쳐 입은 장기 거주인 포스를 내고 있어서, 뭐 삥 뜯는 시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귀가하니 아직 8시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소중한 토요일을 마무리할 수는 없겠지요. 주머니에 현금과 신용카드를 쑤셔 놓고 서둘러 호텔 문을 나섭니다. 조금 쉬겠다고 침대에 눕는 순간,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To be contib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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