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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5 (2) 침사추이 시티슈퍼, 성림거 방문

조던 역 근처의 숙소에 가서 신용카드와 현금을 챙기니, 이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21일 수요일 아침에 백신 2차 접종을 했고, 아직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술맛이 더욱 좋은 것일까요?! 작지만 정신나간 행보를 이어가 봅니다.


본디 제가 계획했던 2차 장소는 너츠포드테라스 거리의 <올 나이트 롱 All Night Long>이라는 펍이었습니다. 홍콩 섬에 란콰이펑이 있다면, 구룡 반도에는 너츠포드테라스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너츠포테라스는 50m 가량의 짧은 골목인데, 침사추이 안의 작은 유럽이라고 불립니다. 멋진 분위기의 웨스턴 바들이 줄줄이 자리잡고 있으며, 코로나 시국에도 항상 인파가 넘칩니다. 지난 번에 산책 삼아 들렀을 때에는 <스페이스 X>라는 바가 제일 흥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차이나 바China Bar>에 사람들이 많군요. 뭐, 저는 '차이나' 글자 붙은 장소를 제 발로 찾아가 돈을 보태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중국에는 샤오미 폰을 통해 제 개인 정보를 꾸준히 보태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갈 일이 있으면 향후 방문하도록 하지요.

8시가 채 되지 않아 찾아간 <올 나이트 롱>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가게 깊숙한 곳에 라이브 공연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세 명의 나이 지긋한 여성들이 제게 해피아워 시간이니 빨리 들어와서 술 한 잔 하라고 꼬십니다. 라이브 공연은 9시 45분부터 시작하는데 9시까지 해피아워라며, 어서 들어오랍니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노천 바는 뭐랄까, 지나치게 썰렁한 느낌입니다. 공연을 매일 새벽 3시 반까지 한다고 하니, 뭐 지금 이 시간에 홀로 앉아서 맥주를 마실 필요까지는 없어 보입니다. 일단 최신 정보를 확인했으니, 제가 원할 때 와서 즐기면 될 듯합니다. 길 건너 재즈바인 <네드 켈리>의 경우도 그렇지만, 저는 라이브 공연을 보면서 술 마시는 편이 좋습니다. 주로 혼자 다니는 편인데, 라이브 공연마저 없이 앉아있기에는 다소 적적합니다.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지만 술이 덜 깨어서인지, 아직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그래서 "홍콩 맥주의 성지"라고 불리는 <시티 슈퍼>에 가서 맥주 투어를 하기로 합니다. 오스틴 역과 가까운 <하버시티 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스틴 역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우연히 홍콩의 포장마차인 <무이키>를 발견했습니다. 젊은 커플들이 한쌍 두쌍 계속 입장하는 광경이 심상치 않습니다. 로컬 분위기를 잔뜩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소문 났는데, 아무래도 혼자 방문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일단 위치만 제대로 파악해 놓습니다.

너츠포드테라스 거리에서 시티 슈퍼까지는 1.5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구글맵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거리는 확실히 더 짧습니다. 다만 시티 슈퍼가 하버시티 몰 3층에 있어, 초행길에는 찾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하튼 동서남북 가늠이 되지 않는 하버시티 몰 안에서 끙끙대며 돌아다니다가 결국 시티 슈퍼를 찾아냅니다.

프리미어 슈퍼 체인답게 내부 인테리어가 매우 고급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판매 가격이 높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중저가 할인마트인 <웰컴>이나 <파크앤샵>과 비교해 볼 때 동일 공산품의 가격 차이는 크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시티슈퍼라는 곳은 그냥 내부를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큰 기쁨을 줍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눈을 씻고 보아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IPA들이 즐비합니다. 솔직히 맥주들을 모아놓은 코너를 처음 마주했을 때 숨이 턱 막혔습니다. 예전 <테이스트> 방문 때처럼 사진을 몇 장 찍어왔습니다만, 일부에 불과합니다. 새로운 IPA들이 너무 많아서 모두 담기를 포기했습니다.

아, 이 덕후의 심장을 강하게 때리는 매니악한 맥주들은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바람의 검심>의 켄신밖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그 명작을 꾸준히 본 것도 아니고 세월도 오래되어 여타 캐릭터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맥주를 눈으로 마신다"는 말의 뜻을 홍콩에 와서 새로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단 맥주 병표지는 무조건 이뻐야만 합니다. 맥주는 먹는 맛 이외에 보는 맛도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제가 IPA 위주로 맥주를 살핀다고는 하지만, Evil Charisma IPA보다는 역시 Kenshin Red X Beer가 더 당기는군요. 저 맥주를 마셔보고 맛이 없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왜냐, 병이 예쁘니까요! 그리고 한 병이 HKD 69라니, 실화입니까? 310ml면 꼬마 중에서도 꼬꼬마 맥주인데 1만 원이 넘으니, 몸값이 엄청나군요. 물론 할인 가격은 HKD 38이긴 합니다만. <바람의 검심> 동아리에 한 병 들고 가면, 환대를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 제가 오늘 몽콕 역에서 조던 역까지 술에 취해 걸어오면서, 평소라면 전혀 방문하지 않을 여러 건물들을 들어가보았습니다. 그냥 궁금했으니까요. 홍콩에는 오락실과 다양한 아니메 상품점들이 말 그대로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냥 동네 오락실일 뿐인데 거하게 코스프레한 커플이 손을 잡고 나와서 기겁했던 적도 있습니다. 홍콩과 타이완은 일본 문화의 굉장한 영향 아래에 놓인 것 같습니다. 사실 말레이시아에서 유학 중인 제 외조카도 <나루토> 광팬입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나루토>로 대동단결하여, 중학교 1학년생들이 복도에서 달리기할 때에는 만화 속 닌자들처럼 뛰어다닌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군요.

https://www.goodgag.net/171861

다시 시티슈퍼의 맥주 코너로 돌아가봅시다.

자, <말차 에일><초컬릿 포터 에일>, 그리고...이게 실화냐....무려 <블랙 트러플 앰버 에일>!!!! 일단 저는 스타벅스 말차 프라푸치노 광팬입니다. 말차 자체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인데요, 말차 에일은 먹고 나서도 건강해질 느낌입니다. 원래 에일이 쌉싸름한 맛이 기본적으로 있는데 말차가 더해지면...아름답습니다, 정말로 아름다워요. 홍콩 독거노인은 이미 여색을 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아름답다는 표현은 오직 맥주에만 씁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초컬릿 포터는 넘어갑시다. 트러플 버섯향이 담긴, 무려 트러플 버섯향이 담긴 앰버 에일이라니요. 이런 맥주가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생각만 해도 그 풍미가 온 입안에 가득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지금 당장 사지 않느냐!! 제 코딱지만한 숙소에 냉장고가 없습니다. 걸어가면 벌써 미지근해져버릴 겁니다. HKD 88의 고급맥주를 미지근하게 마실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다 수가 생깁니다. 급하지 않습니다.) 요즘 트러플 버섯이 실물이든 향이든 다양한 음식들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쯔양이 최준과 함께 찍은 동영상에는 트러플 버섯을 넣은 찜닭이 나오더군요. 진짜이든 가짜이든 그 향이 매우 좋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FYx-qcWaYw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결국 저는 어쩔 수 없는 일본 아니메 덕후입니다. 누가 봐도 손오공을 표현한 저 앰버 에일은 제 감성을 잔뜩 자극합니다.

맨 왼쪽에는 "직장을 때려치워!"라는 과격한 이름의 맥주가 있고, 중간에는 주윤발의 고향인 라마섬을 담은 IPA 맥주가 있네요. 그 외에 <Hong Kong Bastard> IPA도 눈에 띕니다. 저를 기준으로 해서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맥주들을 만들어내는 양조 회사가 얼마나 공을 들여 연구해서 내놓은 디자인이겠습니까. 분명히 IPA 맥주를 찾아다니는 저 같은 고객들은 <조니 워커 블루>를 찾는 고객과는 취향이 판이하게 다를 것입니다. 뭔가 엉뚱하고 톡톡 튀는 디자인을 선호하니까, 맥주마다 저렇게들 화려하고 발칙하게 병표지를 해놓지 않겠습니까. 품위 넘치는 꼬냑 보틀에 Bastard나 Quit your job 등의 문구가 들어가서는 안 되겠지요. 이렇게 저는 세계 IPA 팬들과 유사한 취향을 확인합니다.   

자, 이 맥주캔은 어째서 따로 찍었을까요? 바로 제가 새로운 맥주 종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PA도 IPA도 아닌 XPA입니다. DPA도 있었습니다만, 특별히 다른 종류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XPA는 정말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구글신에게 여쭤보니, "Extra Pale Ale, (XPA) is a style perfectly suited to Australia, sitting somewhere between an American Pale Ale (APA) and India Pale Ale (IPA), it's a style that has captured the Australian consumer."이라고 나오네요. 그 외에 IPA와 XPA를 비교한 글도 있었습니다.

https://www.danmurphys.com.au/liquor-library/beer/styles/xpa-vs-ipa

사실 두 맥주간의 차이를 파악하는 것은 비전문가인 제게는 큰 의미가 없으며, 제 입에 무엇이 더 맛있냐는 점만 중요합니다. 이 친구는 뭔지 모르겠지만 트로피까지 수상했다고 하니 제가 침사추이로 이사온 뒤에 꼭 마셔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많은 다른 맥주 사진들은 패스하고, 역시 홍콩의 명물인 잭 다니엘 콜라를 포스팅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거 진짜 맛있습니다. 푹푹 찌는 홍콩 거리에서 콜라 한 잔 마시고 싶은데 뭔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할 때, 근처 세븐일레븐을 방문하시면 이 친구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미지근하게 드시면 안 됩니다. 오늘 저녁은 마음 먹고 설사 한 번 하겠다는 심정으로 얼음같이 차갑게 만들어서 벌컥벌컥 드시기를 권합니다.  


시티슈퍼에서 정신없이 윈도우쇼핑을 하다 보니 9시가 넘었습니다. 슬슬 배가 고파옵니다. 홍콩에 오면 한 번은 꼭 가봐야 한다는 <성림거 운남쌀국수>를 두 번째 방문하기로 합니다. 너츠포드테라스 거리와 가까이 있어서 찾기에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보십시요. 일본어도 없지만 한글로 친절하게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자주 방문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초행길에 3층까지 올라가다가 귀찮아서 도망갈까봐, 정성스럽게 호구 잡고 있습니다. 빨리빨리 올라와!

자, 드디어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연필과 젓가락, 그리고 가운데에는 주문용지가 꽂혀 있습니다. 거기다가 자신이 먹고 싶은 대로 체크해서 주면 됩니다. 저는 국물의 매운 맛과 신 맛 조절 칸에만 체크하고 추가로 토핑을 넣지는 않았습니다. 저녁 9시가 넘어 식사하면서 배 터지게 먹을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양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HKD 30인 기본 국수에는 이미 채소와 고기가 들어 있습니다. 다만 물이 따로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코카콜라를 추가 주문했습니다. 여기는 코카콜라가 물보다 더 쌉니다.


자, 드디어 기본 쌀국수가 나왔습니다. 홍콩에 한 달 넘게 살아보니, 역시 한국사람은 때때로 매운 음식을 먹어주어야만 합니다. 사실 금요일 저녁에는 또 다른 운남쌀국수 명가인 <탐자이 삼거>에서 마라 쌀국수를 먹었더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성림거>죠. 좌석이 많고 깨끗하며, 에어컨도 시원합니다. 저는 혼자 와 있으므로, 천천히 여유롭게 먹었습니다. 참고로 홍콩에서 돌아다닐때에는 반드시 티슈를 소지해야만 합니다. <성림거>와 같은 유명 체인점에서도 티슈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배가 터질 듯 부르면서도 바닥까지 박박 긁어먹은 뒤 일어나서 계산합니다. 콜라값을 포함해서 HKD 36. 시티슈퍼 맥주값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저렴합니다. 사실 홍콩에 와서 즐길 수 있는 한 끼 음식 가운데 <성림거>가 제일 가성비 높은 것 같습니다. 물론 하루 2번밖에 못 먹는데(저는 16:8 간헐적 단식 중이니까) 가성비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성림거 쌀국수는 제 입에 참 잘 맞고 양이 많으며, 해장도 잘 된다는 점이 무척이나 매력적입니다. 이제 며칠 뒤면 침사추이로 이사올 터인데, 주말에는 성림거에 자주 출몰할 예정입니다. 계산을 마치고 걸어내려 오는데, 다음과 같은 벽보가 눈에 띕니다.

<성림거>가 운남쌀국수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이비종교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포스터 색깔만 보면, 강시 이마에다 철썩 붙여야 할 부적 같기도 하고, '불심으로 대동단결!'을 외쳐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성림거> 문을 나서니 10시가 되었습니다. 귀가하니 10시 반. 씻고 이대로 자버렸어야 했으나, 불행히도 <오징어 게임> 1화 버튼을 누르고 맙니다. 결국 9화까지 연달아 시청했고, 9화를 마치니 아침햇살이 환하네요. 넷플은 정주행이 국룰이죠. 샤워를 마치고 대학교로 향합니다. 아마 오후에는 꾸벅꾸벅 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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