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념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누구나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기초개념들이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기초개념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 및 재고를 거치지 않을 경우, 그런 개념들을 토대로 쌓아올린 모든 연구실적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너무나 당연시하는 기초 개념들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은 항상 외롭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저같이 게으른 한량이 아닌, 고트롭 프레게와 같은 철두철미한 학자가 그런 일을 당할 경우 인류가 겪게 될 무궁한 손실을 생각하면 더욱 아찔합니다. 그가 1884년에 <산수의 기초>라는 책을 출판했을 때, 수학계는 이미 오늘날 수학 박사 과정들조차도 죄다 소화해내기 힘든 고도의 수학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프레게가 숫자란 무엇인가? 1에서 1을 더하면 어째서 2가 되는가? 와 같은 질문을 진지하게 던졌을 때, 그는 laughing stock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버트란드 러셀과 앨프리드 화이트헤드라는 걸출한 수학자가 1910년에 <수학 원리>에서 비로소 "1+1=2"를 "그나마 동료학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증명해냈을 때 전후로 프레게는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개념어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수많은 사람들의 땀이 어린 연구물의 기초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사실 인문학에서 더욱 많은 사례가 발견됩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성인(聖人, saint)이라는 개념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특히 공자와 맹자의 유학(Confucianism)에서 성인이라는 개념은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추상적인 이해를 통해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데도 대부분 학자들이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주류 학계에서 이해하는 saint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어떤 인식 오류도 범하지 않는다. 2) 어떠한 심적 갈등도 겪지 않는다. 우리가 <논어>와 <맹자>를 조금만 제대로 읽어 보아도, 그 안에서 두 학자의 치열한 고민과 내적 갈등을 얼마든지 읽어낼 수 있습니다. <논어>와 <맹자>는 결코 기승전결을 갖춘 창백한 학위 논문이 아닙니다. 공자와 맹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약점과 모순, 거짓과 위선, 갈등과 음모, 고민과 죽음 등이 고스란히 담긴 대화록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학자들과 일반인들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성인은 오류를 범하지 않으며 어떤 내적 갈등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이해로 인해, 오히려 <논어>와 <맹자>를 읽고자 했던 사람들도 등을 돌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점이 많고 앞으로도 많은 잘못을 저지를 것이기에, "완벽한" 사람의 스토리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공자와 맹자를 냉소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거나 갈등을 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뭔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모델을 내세우고자 하는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교황 무오류론"을 만들었고, 북한의 정치인들은 주체사상 안에 "수령 무오류론"을 포함시켰으며, 한국의 NL 운동권 계열 또한 "수령 무오설"을 따라 김일성 대신 학생회장 등을 떠받들었습니다. 이런 "수령 무오설"에 익숙한 586 NL운동권들이 대한민국 정치를 장악했을 때, "누구를" 무오류의 교주로 삼아 지난 5년 동안 한국의 사회 시스템 자체를 망쳐놓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교황무류성(敎皇無謬性, 영어: Papal infallibility)은 교황이 전 기독교의 우두머리로서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교황좌에서 장엄하게 결정을 내릴 경우(ex cathedra), 그 결정은 성령의 특은으로 보증되기 때문에 결단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교리이다. 베드로에게 한 예수의 약속 덕분에, 교황이 그의 최고 권위에 호소할 때 "처음 사도 교회에 주어지고 성경과 전통에 전해지는" 교리에 대한 오류의 가능성으로부터 보호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먼저 "성인은 잘못을 저지르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맹자는 "물론 성인도 잘못을 저지른다."고 답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맹자- 공손추하>에 나오지만, 아래 기사에 친절하게 풀이해놓았습니다. 진가(陳賈)라는 제나라 대부가 맹자에게 찾아가, 주나라 주공(周公)과 같은 성인도 잘못을 범하냐고 질문합니다. 이에 대해 맹자는다음과 같이 대답하지요. "성인 또한 어찌 허물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옛날 군자들은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고쳤는데, 지금 군자라는 이들은 잘못을 저질러도 그것을 계속하는구나. 또한 옛 군자의 허물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서 백성들이 그것을 모두 볼 수밖에 없었고, 그 허물을 고치면 백성들이 당연히 우러보았다. 하지만 오늘날 집정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잘못을 계속 저지를 뿐만 아니라, 뒤이어 남에게 변명까지 하는구나.” 여기서 어떤 연구자는 "성인"과 "군자"는 다르다며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데, 맹자의 텍스트에서 주공(周公)을 일컫는 표현으로 "성인"과 "군자"가 동시에 쓰입니다. 그리고 공자와 맹자가 가장 존경한 성인이 다름 아닌 주공이었습니다. 오늘날 로보트와 같이 완벽하고 무결한 성인군자를 꿈꾸던 연구자나 신앙인, 운동권 투사들에게는 상당히 실망스러운 답변이겠지요. 뭔가 완벽하고 비현실적인 교주를 세워놓아야, 맹목적인 신앙인이나 머리가 깨진 지지자들로부터 "묻지마 지지"를 받을 수 있거든요. 교주가 오류를 범한 듯하면 아랫사람에게 전가해서 꼬리자르기를 하면 됩니다. 어차피 아랫사람도 사이비 교주 덕택에 그 자리까지 올라왔으니, 토를 달 리도 없겠고요. 실제로 진가라는 제나라 대부 또한 "우리 제나라 군주가 잘못을 많이 저지르는데, 옛 성현들도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으니, 피장파장 아니냐?"라고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해 "가불기"의 덫을 놓으러 맹자를 찾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성인도 잘못을 범한다. 하지만 성인은 그것을 고치고 변명하지 않으며, 만인에게 드러내기까지 한다. 네가 모시는 군주는 어떠냐?" 하고 보기좋게 한 방 먹였던 것이지요. 다른 종교나 철학의 '성인' 개념으로 공자와 맹자의 '성인'을 이해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공자와 맹자의 성인은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릅니다. 다만 그것에 대해 변명을 하지 않고 즉시 고치며, 자신을 보다 성장시킬 기회로 삼습니다.
한편 성인은 심적 갈등을 겪지 않는다는 주장 또한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공자나 맹자를 홍콩의 행정장관으로 앉힐 경우, 그 "성현"들이 "모든 이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반길"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을 매주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구체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 판단을 내릴 때, 아무리 이성적이라 하더라도, 시시각각 변하는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단 한 치의 고민과 갈등도 없이 단칼에 해결하고 그런 뒤에도 어떤 고민과 후회 없이 유유자적하게 살 거라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엇보다 공자와 맹자 본인들이 절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터무니없게도, 많은 학자들이 공자와 요순 같은 성현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심적 갈등이 없거나, 문제에 대한 솔루션을 제출하고 난 뒤에 후회가 없거나, 평소에 어떤 마음의 동요도 없다고 가정합니다. 더군다나 정치학이나 사회학 등 현실 학문을 하고 있는 학자들이 그와 같이 주장할 때에는 더욱 당황스럽습니다. 당장 유가의 성인이라 불리는 순(舜)만 해도, 자신의 아버지와 이복동생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려고 시도했었습니다. 그리고 순은 요령 있게 위급한 상황들을 잘 모면하지요. 하지만 진정 온 마음을 쏟아 <맹자>를 읽는 사람은 순이 아버지와 이복동생의 간악한 살해 위협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방법을 쥐어짜냈으며, 그러면서도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컬러풀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순은 왕위를 내다버려도 좋은데, 어째서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냐고 들판에 나가 울부짖기까지 하지요. 그가 어떤 윤리적 상황 판단을 할 때, "이치에 통달했으니 어떤 심적 갈등도 없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주장은 참으로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익숙한 성인인 "공자"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그 또한 수많은 제후국들을 떠돌아 다니며 여러 번 살해 위협을 받습니다. 심지어 그를 모시던 제자 자로가 "군자는 원래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항의하기까지 하지요. 물론 공자는 "군자는 항상 이런 고통을 당한다."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진정 마음으로 <논어>를 읽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죄도 없이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살해 위협을 받고 굶어죽기 일보 직전까지 간 공자가 아무런 욕심 없이 묵묵히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보면서 어떤 심적 갈등을 겪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공자가 저와 같은 말을 할 때, 마치 남 이야기하듯 태연하게 "성현처럼 로보트처럼" 했을 리가 없겠지요. 공자는 제자들이 "정치"나 "인" 등에 대해 동일하게 질문할 때, 제자에 따라 서로 다르게 답해줍니다. 이 때 그 제자의 성향과 기질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제자에 대해서 끊임없이 공부해야만 합니다. 자로나 자공이나 안연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기질을 지녔으며, 심지어 오늘 어떤 기분인가에 따라서도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져야만 합니다. 물론 하나의 이치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saint면 아무렇게나 막 말을 던져도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춘추 시대 수많은 열국들을 주유할 때에도, 어느 나라를 먼저 가야 하며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등에 대한 선택의 순간은 한시도 쉬지 않고 공자 앞에 나타납니다. 성인군자면 이치에 통달했으니까 그런 선택들을 아무런 심적 갈등 없이 단숨에 내릴 수 있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공자가 <논어> 어디에서 그와 같이 말하며 자신했습니까? 공자는 "학이시습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치를 알고 그것을 적용시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합니까? 공자가 만약 대한민국 질병관리청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회적 거리두기를 "저녁 10시까지 4인 모임 허용"이 옳겠습니까, "저녁 11시까지 3인 모임 허용"이 옳겠습니까? 이치를 안다는 것이 이 두 선택지 가운데 더 훌륭한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입니까? 공자와 주자와 퇴계가 말한 "이치를 알고 행한다"는 것이 과연 이런 선택을 의미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공자라면 천리, 다시 말해서 자연법칙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고, 자연법칙에 따라 발생하는 국민들의 감정을 최대한 돌볼 것입니다. 따라서 공자라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마스크는 코로나 방역에 이익보다는 해가 된다."라며 마스크를 벗으라고 권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자라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미디어>에서 나오는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는 음모론이며, 실제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헛소리를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자라면 의사와 약사들의 현장 견해를 최대한 "이성적으로" 반영해서, "마스크 대란"과 같은 어리석은 소동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겸손을 미덕으로 아는 공자라면, K-방역 운운하면서 자화자찬하다가 백신을 타국보다 늦게 구매하고 2022년 4월 현재 일일 확진자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질병관리청장으로서의 공자가 이런 여러 결정들을 내림에 있어 "이치를 알고 성의정심수신이 잘 되니까" 외부 세상을 청취하지 않고서도 홀로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터무니없고 비현실적인 이해입니다. 사실 "심학"을 주장하는 왕양명의 학문에서는 이와 같은 어리석은 주장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세상 만물 이치를 철저히 궁리해야 한다는 "격물치지"를 중시하고 배움을 중시하는 공맹과 주자의 철학에는 저와 같은 어리석음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