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예전에 유학에서의 공(公)과 사(私) 문제에 관해서 학자들과 스터디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저로서는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학자들은 기초개념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생략한 채, 공과 사 개념에 대한 자신들의 선입견을 바탕으로 거대담론을 이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유교, 적어도 <논어>와 <맹자>에서 공(公)과 사(私)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오랜 기간동안 공과 사 개념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것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정당한 문제제기를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대학에 얽매인 학자들은 기초적인 개념 재검토를 하기에는 너무도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곳은 브런치이기에, 전문적인 내용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유학에서 公과 私 개념이 주로 어떻게 쓰이는지 관심이 있는 분들, 그리고 과거 논어와 맹자의 지혜로부터 현대적 영걈과 지혜를 얻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초록 정도의 내용만 요약해보고자 합니다.
흔히 우리는 公과 私를 각각 public과 private로 이해합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확대해 이해하기도 하지요. 또한 公과 私는 동일한 이유로 국가(정부)와 개인, 또는 사회와 개인으로 확장되어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私 개념은 특히 중요하지요. 개인 또는 사적 영역에 속하는 私를 철저히 보호되고 보장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유학의 경전에서 私라는 개념은 흔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띱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私=사적, 개인. 그런데 유학에서는 私를 부정적으로 본다. 따라서 유학에서는 개인이나 사적 영역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公에 비해 열등시한다."라는 의문스러운 삼단 논법이 완성됩니다. 더 나아가 유학에서는 公을 私보다 중시하며, 私는 公에 종속된다. 이 때문에 유학은 국가주의로 흐르게 되어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만약 <논어>와 <맹자> 등에서 정말 公과 私가 이런 의미를 지닌다면 우리는 사실 유학을 더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결론이 나와 있고, 私를 억압하는 公의 폐해에 대한 연구가 평생 다 읽지 못할 만큼 잔뜩 쌓여 있는데 어째서 우리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 개념들을 탐구해야 할까요? 그러나 앞서 제시한 삼단논법은 우리에게 상식처럼 보이지만, 매우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 오류란 무엇인가? 유학에서 私에 가장 가까운 번역은 private이 아니라 selfish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주의가 아닌 이기주의에 가까운 심적 현상을 지적하는데 주로 私란 글자가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현대에서 중시되는 privacy나 individual에 가장 가까운 한자어는 무엇일까요? 바로 自 또는 己 또는 身입니다. 우리가 수신제가라고 말 할 때 쓰이는 身이 바로 많은 문장에서 self, individual로 사용됩니다. 우리는 자기자신(自己自身)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자기자신이 어째서 집단이나 사회나 정부나 국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개인을 의미하겠지요. 그리고 유학에서 自와 己와 身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를 띠지 않으며, 반대로 그 무엇보다 소중히 다루어야 할 대상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유학에서 私는 private이 아닌 selfish에 가까우며, private이나 individual은 차라리 自와 己와 身이라는 단어와 가깝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 한자들이 사용되는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公이라는 글자를 들여다봅시다. 저는 公이 공공선을 넘어서 국가나 정부라는 의미로 유학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selfsh를 의미하는 私보다 公이라는 글자가 중시되어 우위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 번 생각해봅시다. 공자 철학에서 핵심 개념어가 무엇입니까? 公입니까? 맹자 철학에서 핵심 개념어는 무엇일까요? 公입니까? 제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1시간 주자학 강의를 한다고 할 때, 公이라는 개념어에 할애할 시간이 1분이라도 있을까요? 유학에서 핵심개념어가 과연 公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유학에서 핵심개념어는 公이 아니라 인仁과 의義이며, 주자학에서는 동일한 개념이 천리(天理)로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仁과 公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자연법 사상인 유학에서 仁과 公은 각각 자연법과 실정법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仁은 公을 公답게 해주는 근거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公은 仁을 통해서 법적 정당성(legitimacy)을 획득하게 됩니다. 仁이 빠진 公은 얼마든지 전체주의나 국가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유학에서 公은 결코 부정적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다만 仁을 바탕으로 했을 때 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됩니다. 하지만 <논어>와 <맹자>는 기승전결을 갖춘 학위논문이 아닌 대화록이며, 공자나 맹자가 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들은 이미 仁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점을 당연하게 전제하고 대화를 이끌어갑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은 仁이 빠진 公 개념이 지니는 문제점을 <성학십도>에서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물론 그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분명합니다. <성학십도>의 일곱번 째 그림인 <인설도>를 보면 어떤 이가 퇴계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정자의 문도 중에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을 가지고 인의 체(體)로 삼는 이도 있고, 마음에 지각이 있는 것을 가지고 인이란 이름을 해석하는 이도 있으니, 모두 잘못된 것인가?” 이에 대해 퇴계는 다음과 같이 주자의 말을 인용해서 답합니다. "주자께서는 '만물과 내가 하나로 된다는 것에서 인이 사랑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인의 체(體)가 되는 참모습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曰 "程氏之徒。有以萬物與我爲一爲仁之體者。非歟。曰。謂物我爲一者" 曰"可以見仁之無不愛。而非仁之所以爲體之眞也。") 만물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 仁라면(萬物與我爲一爲仁) 참으로 멋진 말인데 퇴계는 어째서 仁에 대한 이런 정의가 仁의 완전한 의미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보았을까요? 그 정의에는 사랑이나 불인인지심이라는 인의 본질적이고 본성적이며 정서적이고 "개인적인" 의미가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萬物與我라는 개념이 公과 결합하면 바로 전체주의나 국가주의로 흐르기 매우 좋지요. 2022년에 시진핑 국가주석이 가장 반길 해석입니다. 오늘날 중국의 대외정책이 萬物與我인데, 이것을 시진핑은 "하나의 중국(One China)" 정책이라고 부릅니다. "천지만물과 내가 일체가 된다고? 정말 신나는걸! 그래, 신장위구르 역사도 내 역사니까, 신장위구르 땅도 내 땅! 티벳의 일부 역사도 중국 역사니까, 티벳 땅도 내 땅! 발해와 고구려 역사도 내 역사니까, 그 땅도 내 땅! 천지만물은 모두 나와 일체가 되어야 해! 천지만물일체위인! 왕양명과 헤겔이 말했듯이, 세계정신으로서의 인을 달성하는 것이 바로 나, 시진핑이 아니던가! 이제 동북공정이나 서북공정 등은 지겨워. 어느 정도 역사 왜곡으로 터도 잘 닦아놓았고. 이제는 '해양굴기'이다! 남중국해도 모두 중국 꺼! 이어도 주변해역도 전부 중국 꺼! 아, 이제는 '우주굴기'도 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중국은 21세기 초까지는 땅덩어리를 놓고서 천지만물일체위인 정책을 진행했고, 이제는 바다와 하늘, 나아가서 우주를 놓고서 천지만물일체위인 정책을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개인적인 면이나 공감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이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유학에서의 공(公)과 사(私) 개념에 대한 주류 학계의 피상적이고 편향적인 해석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해석 자체에 문제가 있지만, 결국 그런 해석이 공자와 맹자를 한비자로 둔갑시키기 때문입니다. 홍콩에 살다 보니, 정말 오늘날의 중국 정부가 통치 이념으로 삼는 철학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네요. KBS가 호주와 중국의 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아주 훌륭합니다. 중국의 "천지만물일체위인" 정책이 구체적으로 호주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영상이니,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