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는 중국 전국시대 말엽에 활약했던 법가 철학자입니다. 그는 노자와 장자, 묵자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순자의 제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했던 법가 사상가로는 상앙이나 신불해 등이 있지만, 법가 사상을 하나의 세련된 제국통치철학으로 제시한 마지막 인물은 단연코 한비자입니다. 한비자의 정치철학 속에는 수많은 이슈들이 있는데, 오늘 간략하게 짚어볼 주제는 "왕권과 신권의 권력 범위"입니다.
한비자의 정치철학은 철저하게 절대군주제를 옹호하며, 신하나 (군주를 제외한) 왕족이 군주의 권력을 침범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는 백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정치철학자들이 <한비자>에서 백성을 위하는 "민본사상"을 읽어내려고 하지만, <한비자>에서는 신하나 왕족은 물론이요 백성의 이익이나 권리조차 군주의 이익과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허용됩니다. 당연히 <한비자>에서 신하와 왕족, 백성의 이익과 권리는 일정 부분 보장되게 되어 있습니다. 군주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서는 그 아래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 또한 일정 부분 이익과 권리를 누려야만 합니다. 이 때문에 <한비자>에서는 "공평무사"나 "표준화" 등 이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려야 한다는 구절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오늘날 <한비자>를 민본사상이나 사회적 정의론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저는 그런 움직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조국 전 민정수석의 표현을 제 나름대로 옮겨본다면, 가재 붕어 개구리들이 사는 개울에서는 공평무사와 표준화 등 그 미물들이 만족할 만한 시스템을 갖추어 주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가재 붕어 개구리들이 용의 지위나 세계를 넘보며 선을 넘으려 한다? 어림 없는 이야기입니다. <한비자>에서 현대 학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수많은 미사여구들은 "군주" 본인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닙니다.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군주조차 제약받는다고 해도, <한비자> 내에서는 군주를 견제할 수 있는 견제장치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군주가 싫다고 하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한비자>에서는 "무위"의 통치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제 이 점이 많은 정치철학자들의 관심사입니다. <한비자>에서 무위의 통치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군주의 자질에 관계없이 지속가능한 "왕가(royal family)"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많은 학자들이 "왕가 시스템"이 아닌 "국가 시스템"이라고 이해하는데,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국가 시스템의 목적이 "국민 전체가 아닌 왕가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북한을 살펴보면 됩니다. 물론 "백두 혈통"이 유지되려면 북한이라는 국가 또한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모든 정책에는 우선순위가 있지요. 북한 김씨 왕조의 최대 관심사는 "왕조의 유지"입니다. 2022년 푸틴이 그러한 것처럼, 국민들의 삶이 파탄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음으로 내몰리더라도 자기 권력의 유지가 우선입니다. 그리고 "수령론"을 포함한 주체 사상은 겉으로는 번지르르하게 모든 인민을 위한다지만, 실질적으로는 김씨 왕조의 영속성을 최고 목표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을 문재인 정부가 놓쳐서 김씨 왕조로부터 "삶은 소대가리," "특등 머저리" 소리를 듣고 말았지요. 왜냐하면 "남북 통일"은 "김씨 왕조 유지"와 양립할 수 없는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통일 대한민국에서 김씨 왕조라니, 가당치 않은 이야기지요. 김정은 국방위원장은 "김씨 왕조 체제의 안전 보장"이 최우선 과제였고, 이를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보장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이 그 중간다리 역할을 해주기를 바랬으며, 문 대통령이 자기 주장을 꺼내놓거나 중간에 참견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공정과 상식을 무너뜨리고 평창 올림픽 남북단일팀을 구성하여 대한민국 선수들에게 피해를 끼쳤던 "통일지상주의자" 문재인 대통령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아니지요. 북한은 오직 "김씨 왕조 체제 보장"만을 안건으로 삼기를 원했고, 통일 이슈는 뒷전이었으며 통일과 관련되어 중국까지 회담 테이블에 끼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공감능력이 결여된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의 속내를 읽지 못하고 "종전 선언"이나 "통일 대비" 등을 계속 협상 테이블에 꺼내들었고, 결국 "삶은 소대가리"와 "특등 머저리"로 전락했습니다. 딴 길로 많이 새어나갔는데, <한비자>에서 무위의 통치란, 세습군주제에서 연이어 등장하는 군주들의 개인적인 자질과 관련없이 지속가능한 "왕가 시스템" 구축과 깊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한비자>에서 무위의 통치가 지닌 두 번째 의미는 "손 안 대고 코 풀기"입니다. <36계>에서는 "차도살인"이라고도 하는데요, 군주의 이익과 권위에 손상을 끼칠 우려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행위는 군주가 직접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년 동안 즐겨 하던 수법이지요.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재명 국회의원 후보를 대신해서 온갖 욕을 얻어먹는 돌격대가 줄을 지어 서 있지요. 하지만 이 두 번째 의미는 오늘 다루지 않고자 합니다.
"군주의 자질과 관계없이 지속가능한 왕가 시스템"이라는 개념은 학계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데, 한비자와 진시황의 관계 및 역사적 배경을 볼 때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야만 합니다. 흔히 <한비자>는 마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특정한 군주 한 명에게 유리한 통치철학을 제공하는 것으로 오해됩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진시황이라는 인물은 <한비자>를 읽고 너무도 감탄하여 작가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했으며, 결국 한비자를 사신으로 불러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첫 통일제국을 일궈낸 진시황은 자신의 후계자가 무려 만 번째까지 지속되기를 원했습니다. 루이 16세나 찰스 2세가 아닌 "진시황 1만세"를 꿈꾸었지요. 진시황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시죠.
“짐이 듣기에 태고에는 호만 있고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에는 호가 있고 죽은 뒤에는 행적에 따라 시호를 정했다고 한다. 그랬다면 자식이 아비를 논하고 신하가 군주를 논하는 것이니 이는 진짜 도리가 아니다. 짐은 이를 취하지 않고 지금부터 시호법을 없애겠노라. 짐을 시황제라 부르고, 그 뒤는 수를 헤아려서 2세, 3세하여 만 세에 이르기까지 무궁하게 전하라.”
[네이버 지식백과] 권6. 진시황본기 [卷六. 秦始皇本紀] - 한글 번역문 (사기: 본기(번역문)
중국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왕조를 개창한 군주 가운데 자신의 대에서 왕조가 패망하기를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혈육이 계속해서 왕위를 이어가기를 원했지요. 하지만 진시황의 뒤를 잇는 혈육들이 반드시 그만큼 머리가 비상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의 증손이나 고손이 평범하거나 멍청하다고 하더라도, 진나라 왕조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진시황의 신념이겠지요. 그리고 누구보다도 영리한 악당이었던 진시황은 <한비자>에서 이와 같은 "지속가능한 왕조 보장" 사상을 읽어낸 것입니다.
"제국empire"은 군주의 개인기만으로는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진시황처럼 여색을 밝히고 식욕과 물욕이 강하며 음주가무를 즐기는 인물에게는 특히 그러합니다. 그동안 고생해서 창업을 이루었으니, 이제 "무위의 통치"를 통해서 자기가 신경 안써도 잘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좀 놀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울러 펑펑 놀면서도 내 멍청한 자손들이 안정적으로 왕조를 계승해나가야 하겠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오늘날 정치철학자들이 자주 던지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만약 군주의 직접적인 통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시스템이 정착된다면, 군주는 소외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무위의 통치가 극단적으로 가면, 애초 군주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스템이 군주의 위에 자리잡는 까닭에, 군주의 절대권력이 위태로워지지 않을까요? <한비자>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런 의문은 사라집니다. 첫째, <한비자>의 국가 시스템은 인민이나 신하가 아닌 군주의 권력을 철저히 보장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만약 무위의 통치가 모든 국가 구성원의 "동등한" 이익과 권리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면, 당연히 군주가 소외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한비자>의 국가 시스템은 군주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설계되었고, 군주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도 내에서 여타 국가 구성원들이 자기 나름의 이익과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둘째, <한비자>는 절대군주제를 위한 철학이되 군주 본인을 견제하는 장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군주는 자신이 소외되거나 자신의 권익이 침해당한다고 여길 경우 언제든지 당근과 채찍을 이용해서 아랫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요소로 인해, <한비자>의 "무위 통치 시스템"에서 군주는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며 여타 구성원들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정치철학자들은 이럴 경우, <한비자>에는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한비자>는 공평무사(impartiality)를 주장했는데, 군주에게만 이런 룰(rule)이 적용되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고 말이지요. 다시 말해, 공평무사한 시스템이 일단 갖추어졌다면 군주도 그 시스템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론입니다. 조선 후기 "예송 논쟁"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에 대해, "<한비자>는 원래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않으며, 정말 군주마저 시스템에 종속되는 철학이라면 진시황이 좋아했겠는가?"라고 되묻겠습니다. 사실 <한비자> 철학을 가장 영리하게 이용한 집단은 다름 아닌 현대 중국 공산당 지도층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모든 인민의 평등을 주장했지만, 공산당 최고위 간부들에게는 치외법권이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암묵적인 룰을 중국에서는 "형불입상 사불입국(刑不入常 死不入局·상무위원은 처벌받지 않고 정치국원은 사형당하지 않는다)"이라고 합니다.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보시죠.
"중국 지도부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한 현대사의 비극인 문화혁명(1966∼1976년) 이후 지나친 권력 충돌을 막기 위해 최고 지도부가 국가 반역만 하지 않는다면 일신의 안전을 평생 보장해 주기로 합의했다. 중국을 마오쩌둥 한 사람이 아닌 집단지도체제로 운영하되 각자의 정치적 차이를 인정함과 동시에 타협을 통한 복수의 상무위원 지배를 사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정치적 묵계를 만든 것이었다. 상무위원은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의 약자다. 당이 국가에 앞서는 중국에서 당의 지도부인 중앙정치국원(25명)에서 선임되는 7명(시진핑 체제 기준)의 최고 실세 그룹이다. 각자 국가주석, 국무원 총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등을 겸하며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中공산당 ‘刑不入常 死不入局’ 34년 묵계 깨져 (donga.com)
중국의 통치 시스템이 제아무리 공평무사를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가재 붕어 개구리"에게만 해당합니다. <한비자>의 "군주"나, 중국 공산당의 "7인 상무위원"은 그 법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물론 시진핑 주석은 집권 초기에 정적 제거를 위해 이 관행을 깨뜨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진핑 본인이 치외법권에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별명이 "시황제"이겠지요. 철저히 군주의 입맛에 맞춰 작성된 <한비자>에게서 합리적이고 일관된 논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는 <한비자>에 대한 오독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https://weekly.donga.com/3/all/11/3046531/1
자, 그런데 여기에서 오늘의 주제와 관련된 마지막 이슈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다름아닌 신권과 왕권의 관계입니다. 한비자라는 역사적 인물은 <한비자>라는 저서를 통해 진시황의 호감을 샀으며, <한비자> 내에서 신하는 군주의 권익에 철저히 봉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제국통치철학의 실질적인 설계자는 진시황이 아닌 한비자이지요. "자신의 권익과 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설계자라니,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이지요. 한비자 본인의 철학에 따르면 한비자의 목숨은 진시황에게 달려 있으며, 진시황의 폭주를 견제할 아무런 장치도 그 이론 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한비자는 진시황이 즐겨 받아들인 자신의 이론 내에, 적어도 자신의 안전과 지위를 보장할 내용을 포함시키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한비자는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제가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 한비자는 (자신이 포함될) 최고위 관료의 안전 보장 문제에 대한 언급 자체를 피했습니다. 어찌 보면 현명한 선택입니다. 만약 한비자가 조금이라도 "재상"의 위치를 높였다면, 영민한 진시황이 그 의도를 간파했겠지요. 하지만 이런 학문적인 부정직함으로 인해 그의 죽음이 오히려 앞당겨졌다고 저는 봅니다. 만약 한비자가 무위 통치 시스템을 설계할 설계자의 지위를 강조했다면, 진시황은 처음부터 <한비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고, 한비자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옥사할 일도 없었겠지요. 하지만 결국 한비자는 모함을 받아서, 진시황의 명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군가가 한비의 책을 진(秦)에 가지고 갔다. 진왕이 「고분」, 「오두」의 글을 보고는 “아! 과인이 이 사람과 사귈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했다. 이사(李斯)가 “이건 한비의 저서입니다.”라고 했다. 진이 이로써 한을 서둘러 공격했다. 한왕이 당초 한비를 기용하지 않다가 급해지자 한비를 진에 사신으로 보냈다. 진왕이 기뻐했지만 한비를 믿고 기용하지는 않았다. 이사와 요고(姚賈)는 한비를 시기하여 이렇게 헐뜯었다.
“한비는 한나라의 공자입니다. 지금 왕께서 제후들을 합병하려 하시는데 한비는 결국은 한나라를 위하지 진나라를 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인지상정입니다. 지금 왕께서 그를 기용하지도 않으시면서 오래도록 머물게 했다가 돌려보낸다면 이는 스스로 후환을 남기는 일입니다. 잘못을 잡아서 죽이느니만 못합니다.”
진왕은 그렇다고 생각하여 옥리에게 넘겨 한비의 죄를 다스리게 했다. 이사가 사람을 보내 한비에게 독약을 주고는 자살하게 했다. 한비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었다. 진왕이 후회가 되어 사람을 보내 사면시켰으나 한비는 이미 죽은 뒤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비자 [韓非子] - 한글 번역문 (사기 : 열전(번역문).
흥미롭게도, "왕권과 신권"의 긴장 속에서 "신권"을 강조했다가 "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인물이 역사적으로 적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한비자의 법가 선배인 상앙이지요. 그는 상군(商君)이라고도 불리며, 진시황의 선조인 진나라 효공에게 등용되어 "공평무사한" 법가 정치를 10년 넘게 시행했습니다. 사회는 안정되었지만, 상군은 공포 정치를 통해, 태자의 태부인 공자 건(虔)을 처벌하고 그 태사 공손고(公孫賈)에게는 얼굴에 뜸을 뜨는 경형(黥刑)을 내렸지요. 이제 상군의 강력한 신권은 왕권을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상군의 뒤를 돌봐주던 진나라 효공이 사망하자, 그는 반역을 꾀한다는 음해를 입고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 사마천의 붓을 통해 결과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로부터 다섯 달, 진 효공이 죽고 태자가 섰다. 공자 건의 무리가 상군이 반역을 꾀한다고 알리자 관리를 뽑아 상군을 잡게 했다. 상군이 함곡관 아래까지 도망쳐 객사에 묵으려 했다. 객사 주인이 그가 상군일 줄 모르고 “상군의 법에 묵으려는 사람의 신분증이 없으면 함께 처벌받습니다.”라고 했다. 상군이 탄식하며 “어허, 법을 만든 폐단이 여기까지 이르렀구나!”라고 했다. 그곳을 떠나 위로 갔다. 위 사람들은 그가 공자 앙을 속이고 위의 군대를 격파한 일에 원망을 품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군이 다른 나라로 가려 하자 위 사람이 “상군은 진의 죄인이다. 강한 진나라의 죄인이 위에 들어왔으니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며 진으로 들여보냈다.
상군이 다시 진으로 들어와 상읍으로 달아나서는 그 부하들과 읍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정을 공격했다. 진이 군사를 내어 상군을 공격하여 정의 민지(黽池)에서 죽였다. 진 혜왕은 상군을 사지를 찢는 거열(車裂) 형벌을 가하고 조리를 돌리고는 “상앙처럼 반역하지 말라!”라고 했다. 마침내 상군의 집안을 다 없앴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68. 상군열전 [卷六十八. 商君列傳] - 한글 번역문 (사기 : 열전(번역문)
조선에 관심이 많은 독자께서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 문제가 정도전과 이방원 사이에서 두드러졌으며, 결국 이방원 무리의 손에 정도전이 살해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비록 정도전은 법가 사상가가 아니며 한비자와는 시공간을 달리하지만, 그들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일합니다. 그래도 유가 사상에서 "무위의 통치"는 민본정치와 직결되며 군주보다 백성을 앞세우기 때문에, 이론가로서의 정도전의 죽음은 다소 억울한 데가 있습니다. 물론 정치인으로서의 정도전의 경우는 다르지만 말이지요. 하지만 법가 사상가인 한비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정치사상으로 인해 자기가 죽게 되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법가 사상가인 상군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 유명한 두 법가 사상가의 죽음이야말로 법가 사상이 지닌 취약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