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치(禮治)는 법치(法治)의 부정인가: 처벌만능주의와 규제만능주의의 폐해
오늘날 학계에서 "유가는 예치(禮治), 법가는 법치(法治)"라는 등식이 폭넓게 수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저와 같은 등식 자체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보지만, 정작 문제는 예치(禮治와 법치(法治)의 관계 설정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학자들이 "예(禮)로 국가경영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인 이상론이다. 법(法) 없이 현실은 다스려지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든, 현실 세계는 '예'만으로 다스려지지 않고 반드시 법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질문을 정확히 설정하는 작업을 제대로 수행해야만 합니다. "유학이 정말로 예만 필요하고 법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는가?"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주자학'에서 예치는 법치를 배제하는가?"라는 질문이 우리가 알고자 하는 답에 이르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유학"에 대한 이해가 매우 다양하므로, "유학에서 예와 법의 관계"라는 질문에 양립불가능한 여러 답안이 제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자학"만으로 범위를 좁히면, 우리는 상당히 정확하고 생산적인 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최대 관심사인 "조선 왕조"는 "주자학"의 나라이므로, 주자학만으로 범위를 좁혀 다루는 편이 옳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브런치>이며, 전문적인 해설로 골머리를 앓는데 적절한 공간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예치와 법치의 관계를 다룰 때 항상 빠지지 않는 <논어>의 한 구절을 직접 같이 읽어봄으로써 공통된 이해를 구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함께 읽어볼 논어 말씀(위정-3)은 다음과 같습니다.(<전통문화연구회> 성백효 번역)
道之以政하고 齊之以刑이면 民免而無恥니라.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인도(引導)하기를 법(法)으로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형벌(刑罰)로 하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免)할 수는 있으나, 부끄러워함은 없을 것이다.
[주자 해석] 도(道)는 인도(引導)와 같으니, 솔선수범(率先垂範)함을 말한다. 정(政)은 법제(法制)와 금령(禁令)을 말한다. 제(齊)는 통일(統一)시키는 것이니, 인도해도 따르지 않는 자를 형벌을 가하여 통일시키는 것이다. 면이무치(免而無恥)는 형벌은 면하나 부끄러워하는 바가 없음을 말하니, 비록 감히 악한 짓을 하지는 못하나 악한 짓을 하려는 마음이 일찍이 없지는 못한 것이다.
道之以德하고 齊之以禮면 有恥且格이니라.
인도(引導)하기를 덕(德)으로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예(禮)로써 하면, <백성들이>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 선(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주자 해석] 예(禮)는 제도(制度)와 품절(品節)이다. 격(格)은 이르는 것이다. 몸소 행하여 솔선수범하면 백성이 진실로 보고 감동하여 흥기 하는 바가 있을 것이요, 그 얕고 깊고 두텁고 얇아 균일하지 않은 것을 예(禮)로써 통일(統一)시킨다면, 백성들이 선(善)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또 선(善)함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일설(一說)에 격(格)은 바로잡는 것이니, 《서경(書經)》에 ‘그 그른 마음을 바로잡는다.’라고 하였다.
○ [주자 생각] 내가 생각건대, 법제(法制)는 정치(政治)를 하는 도구이고, 형벌(刑罰)은 정치(政治)를 돕는 법이며, 덕(德)과 예(禮)는 정치(政治)를 내는 근본(根本)인데, 덕(德)은 또 예(禮)의 근본이다. 이것은 서로 종(終)과 시(始)가 되어, 비록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으나, 법제(法制)와 형벌(刑罰)은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멀리하게 할 수 있을 뿐이며, 덕(德)과 예(禮)의 효과인즉 백성으로 하여금 날로 개과천선(改過遷善)하면서도 자신도 알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한갓 그 지엽적인 법제(法制)와 형벌(刑罰)만을 믿어서는 안되며, 마땅히 그 근본인 덕(德)과 예(禮)를 깊이 탐구해야 할 것이다.
자, 우리는 주자가 공자의 말씀을 얼마나 주의 깊고 세심하게 다루었는가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위정-3>은 많은 학자들에게 "예치+덕치 vs. 법치+형치"로 오해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자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주자에게 있어 "덕"과 "예"와 "형정"은 대립 관계가 아닌, 시종관계 또는 본말관계(근본과 지엽 관계)입니다. 첫째, 법과 형은 각각 정치를 하는 도구이자 정치를 보조하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덕과 예는 정치가 나오는 근본입니다. 그리고 덕과 예 가운데에서도 덕이 예의 상위개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자학에서의 개념적 우선순위를 "덕>예>형정"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자가 덕과 예가 더욱 중요하니, 형정은 필요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예가 형정의 상위개념이기 때문에 예치에는 법치가 필요없다고 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덕이 예의 상위개념으로 덕치에는 예치가 필요없다는 주장도 성립 가능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얕게 이해하는 학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거칠게 "성선설이면 예나 법이 무슨 필요가 있어? 인간은 그냥 선하니까 다 필요없고, 오직 선한 본성만으로 살면 되는거 아니야? 그런데 왜 주자는 성선설을 주장하면서도 예와 법을 이야기하지?"라고 단숨에 말해 버립니다. 그 결과는 "양명 좌파"의 사례와 같이, 현실 속에서 거의 못하는 짓이 없는 사태로까지 치닫게 됩니다.
그러나 1130년에 태어나 1200년에 사망한 주자보다도 못한 주장을 펼치면서 본인이 대단한 혜안을 지닌 듯 자처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밑줄을 그어놓은 부분을 보면, 주자는 예와 법(형정)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잘라서 말합니다. 그러나 다시 아래 내용을 보면, 예와 법의 주된 기능이 서로 다릅니다. 법은 "죄를 멀리하는데" 도움이 되며, 예는 "선으로 나아가는데" 의지가 됩니다. 위선(爲善)과 거악(去惡)의 양쪽 측면으로 굳이 나누어보자면, 덕과 예는 위선(爲善)에, 그리고 정과 형은 거악(去惡)에 주된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위선(爲善)과 거악(去惡)이 동일한 무게감을 지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선설을 공리로 삼는 주자학에서 위선은 항상 거악보다 본질적이며 우선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선과 거악을 항상 동일한 비중으로 가져가려고 하다 보면, 반드시 위선보다는 거악에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선을 행하는 것은 항상 어렵지만, 타인의 악을 지적하는 것은 항상 쉽고 통쾌하기 때문입니다. 본디 거악 또한 내 자신의 악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살다 보면 그러기 쉽지 않지요. 개인의 악을 제거하는 것은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 같고, 사회의 거대악을 제거하는 것은 항상 뭔가 있어 보이니까요. 그래서 과거 민주화 투사들이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고 마는" 현실을 우리는 목격 중입니다.
게다가 덕과 예를 바탕으로 한 교화 없이 형과 정만으로 국가를 통치하게 될 경우, 공자는 "백성들이 형벌을 면하려 하기만 하고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지적합니다. 이 말은 정말 만고의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2022년 현재 일어나는 모든 내로남불이 여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조국 전 민정수석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인들은 잘못을 지적받으면 "절차적으로는 하자가 없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물론 부끄러움은 남의 몫이지요. 내로남불을 자처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내가 현행법을 어긴 사실이 있는가?"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법학자 또는 법조인이라는 점도 공자의 말씀이 정당하다는 점을 뒷받침합니다. 그들은 애당초 "자신의" 덕과 예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타인의" 악을 제거하는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악에는 관대해졌으며, 그에 따라 부끄러움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덕과 예를 무시한 채 형과 정에만 기대는 정치가 가져올 폐해입니다. 그러나 주자는 <논어>를 해설함에 있어 '덕과 예'를 '형과 정'에 대립시키지 않았으며, '형과 정'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공자가 "예와 덕" 그리고 "형과 정"이라는 개념을 들여올 때, 그가 걱정했던 점은 "형과 정" 자체가 아니라 오늘날 표현으로 "법만능주의"입니다. 예와 덕이 빠진 "형과 정"의 세상은 곧 "처벌만능주의" 나 "규제만능주의" 등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102086632259712&mediaCodeNo=257&OutLnkChk=Y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45334
정리해봅시다. 주자학에서 "예와 덕" 그리고 "형과 정"은 양립불가능한 요소가 아닙니다. 전자와 후자의 관계는 시종관계 또는 본말 관계를 지니며, 주자학에 근간하여 이루어지는 통치는 형벌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예치"와 "덕치" "법치" 등의 개념은 많은 혼란을 가져오며, 우리는 차라리 유가의 경전에 있는 기초개념을 중심으로,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성선설이 옳다면 예의는 필요없다." 또는 "유가는 예와 덕을 중시하니 형벌은 필요없다." 등의 주장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유학에서 형벌은 이론에 어긋나지만 현실상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제도적 개념이 아닙니다. "형과 정"은 유학 내에서 각각 자신의 역할이 있으며, 우리는 그들을 필요 범위를 넘어서까지 적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위정자는 대부분 예와 덕보다는 형과 정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기 때문입니다.